미국으로 들어온 최초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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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이민
  • 그 시작의 배경

1863년 고종이 12세 어린 나이로 26대 조선의 임금이 되자,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섭정을 통해 쇄국정치를 실시했다. 1866년 대원군은 가톨릭 교인이었던 홍봉주와 남종삼 등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죽이고 8도에 영을 내려 많은 가톨릭 신자를 학살했다.

그해 8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강철, 유리제품 등을 싣고 대동강 상류로 올라와서 통상을 제의했으나 조선의 봉건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미국인들은 작은 배를 타고 평양 상륙을 시도하자 충돌이 발생해 평양 관리들이 사망하는 일이 생겼다.

3일간의 소규모 전쟁 후 결국 셔먼호가 불에 타서 침몰하자 1871년 미국 측은 사건조사를 목적으로 군함 5척을 파견했다. 그리고 강화도를 점령하려 했으나 조선의 완강하게 저지하는 바람에 물러가야 했다. 그것이 ‘신미양요’였다. 강화도에서 운양호사건을 일으킨 일본 또한 1876년 2월 26일에는 강압적으로 강화도에서 조선과 ‘병자수호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 하도록 했다.

차츰 한국문호가 개방되기 시작하자 열강들은 다투어 수교를 맺으려 들었다.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선 전권대신 신헌과 전권부관 김홍집이 미국 군함 스와타라호를 타고 온 미국 전권대사 해군 제독 슈벨트와 중국 이홍장의 도움으로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그것은 서방 국가와 체결한 첫 조약으로 6월에 영국과 독일도 같은 장소에서 수호조약을 맺어 인천은 조선의 첫째가는 개항이 되었다. 조약 체결 후 미국은 1883년 5월 초대 주한 공사로 Lucius Foote를 파견하자 고종은 그 기념으로 1883년 7월 16일 민영익을 단장으로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변수 등 보빙사절단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조선 정부는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사절단의 이름은 ‘먼저 방문해주신 데 감사드리는 사절’이라는 뜻의 ‘보빙사’(報聘使)였다. 왼쪽부터 통역 Percival Lowell, 부사 홍영식, 정사 민영익,
서기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 후열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길준 1883년
견미 친선사절단(샌프란시스코 팰리스 호텔 투숙)

미국고문 프레드릭과 사절단 일행이 된 그들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그 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팰리스 호텔에 일주일을 머문 후 기차로 워싱턴까지 갔는데, 각종 행사나 투숙지마다 태극기를 휴대하고 게양해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과시하는 자주외교를 펼쳤다. 그들은 미국을 견문하는 동안 미국에 호감을 갖고 조선도 근대적인 제도와 문물수용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유길준은 그들과 함께 귀국하지 않고 최초의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했는데 귀국 길에 유럽까지 돌아보고 견문을 넓힌 후 돌아가 ‘서유견문’을 집필해 서방세계를 조선에 처음 소개했다. 그 책을 읽은 양반들은 서방세계를 동경하게 되었고 사절단으로 다녀온 사람들은 오히려 점진적인 조선의 개혁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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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려던 사람들과의 견해차이로 1884년 10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개화파의 실패로 서광범, 서재필, 박영효는 망명객이 되어 188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망명했다.

1887년 11월 12일에는 고종의 대미 자주외교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에 전권공사를 설치하려고 초대 공사 박정양과 이완용, 이하영, 이상재 등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또한 외교 군사고문관의 초빙이 추진되어 친 개화파가 형성됐다. 그러나 주미공사로 1888년 1월 박정양이 부임하자 청나라는 조선이 자신들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압력을 가해 공사는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 돌아 온 그는 미국의 제도와 문물을 상세히 소개한 ‘미속습유’를 저술해 고종과 정부 관리들이 대미관계에 호의적이도록 분위기를 형성시켰다.

1894년에는 동학란 그리고 1895년에는 민비 암살사건으로 사회는 어수선했고 민심은 흉흉했다. 그 혼란하던 때 미국으로 간 사람은 1898년 이후 의주의 인삼장수 몇 사람이었다. 그 수효는 극히 적었고 그들은 중국인 행세를 했기에 중국인으로 취급됐다.

하와이가 미국령이 되기 전인 1900년 1월 15일 양백인(31)과 김이유(34) 두 사람이 최초의 한인입국자로 미 이민국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양씨는 180달러를, 김씨는 400달러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중국인에게 비싼 값으로 인삼이 팔리던 시절이라 그들도 인삼장수로 추측된다. 1849년(49ers) 샌프란시스코 골드러시 붐으로 미국에 온 중국인들은 폐광 속에서 부스러기 금을 채취하며 돈을 많이 벌었고 그들은 조선 인삼을 매우 선호했기 때문이다.

1900년 6월 14일 하와이가 미국령으로 완전 합병한 뒤 실제로 미국에 입국한 최초의 민간 한국인은 1901년 1월 9일에 도착한 유두표라는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미국에 이민을 올 수 있던 근거는 ‘조선 백성은 미국 어느 곳에나 왕래하고 거류하며 토지와 가옥을 매매하고 건축할 수 있으며 법률에 적당한 영업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한미조약 6조 때문이었다. 하와이에 정식 이민이 열리기 이전까지 미국에 온 사람은 관사, 정치 망명객, 유학생, 상인들이었는데 총 숫자는 30여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미주 한인사회에는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던 세 사람은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이었다. 안창호는 1902년에, 이승만은 1904년에, 박용만은 1905년에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입국했다. 윤치호, 김규식, 이강 등 이민 지도자들도 이를 전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미국정부는 11월 30일 서울 주재 공사관을 폐쇄했고 12월 16일에는 워싱턴 주재 한국 주미 공사관도 폐쇄했다.

한편 고종은 을사보호조약 후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렇게 세 밀사를 파견해 조선의 사정을 만방에 알리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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