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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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캘리포니아 주는 곳곳마다 개척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황무지가 옥토로 변하여 쌀 농장으로 바뀌고 캘리포니아의 주요도시를 연결되어 서부해안과 동부까지 잇는 교통망이 완성됐다.

철도공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흥분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규모 공사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인력만으로는 역부족이어서 모자라는 인력은 타 지역에서 유입이 불가피했다. 동양인들은 성실하고 근면했으며 임금도 미국인들에 비해 저렴했다. 캘리포니아에 동양인의 이민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캘리포니아 개척 소식은 하와이에 있던 한인들에게도 솔깃한 내용이었다. 더구나 캘리포니아 임금은 하와이의 농장 임금에 비해서는 월등히 높은 편으로 미국 본토의 비슷한 노동에 비해 3분의 1 또는 절반가량이 낮았다. 하와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미국 본토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임금뿐만 아니라 농장에서 받는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은 그들은 누구나 대륙으로 진출을 하고 싶어 기회를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몇 년 고생한 후 돈을 벌어 귀국을 하려던 한인들에게 본토진출은 더욱 절실한 소망이 되었다.

학업에 뜻을 두고 하와이로 왔던 이들 또한 본토로 가기를 열망했는데 광활한 곳 좋은 환경에서는 일을 하거나, 학교선택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하와이보다는 수월하다는 판단을 했다.

윤응호는 윤치호의 격려로 샌프란시스코로 향했고 양주은도 학업을 위해서는 본토로 가야한다고 판단했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온 사람은 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다른 자료 ‘The Korean Immigrants in America (문 형준 교수)’에 따르면 1903년부터 1913년까지 하와이에서 본토로 한인들은 4~5백 명가량인데 이중에 절반정도가 학교에 다니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기후도 한인들이 이주를 원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사계가 뚜렷한 한반도에서 살다 온 한인들은 매일 1백도가 넘는 뙤약볕에서 노동하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캘리포니아는 사철 날씨가 좋고 일거리도 풍부하다는데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국 본토로 들어오는 관문인 샌프란시스코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동양권과의 무역이 이뤄지고 있어 문화교류도 활발해 동양인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 때 하와이의 한인들에게 본토진출의 기회를 주려고 처음 등장한 회사가 있었다. 철도회사였다.

1903년 유니온 퍼시픽과 태평양철도회사는 워싱턴 주 시애틀 항에서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까지 철도를 부설하려고 무려 2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노동자를 모집했다. 모집대리인의 자격을 얻게 된 문홍석은 그들로부터 위임을 받아 자신이 경영하는 호놀룰루에 있던 한성여관에 사무소를 차렸다.

1905년 3월부터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 일을 기회로 많은 한인들은 미국본토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호놀룰루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배로 6일이 걸리고 배 삯은 28달러정도였다. 그 후 캘리포니아를 연결하는 철도공사나 농장 개척 사업에 필요한 인부들을 모집하는 공고가 하와이에 줄을 잇게 된다.

◈ 1906. 3. 12 (공립신문): 한인들은 하와이에서 미주 본토로 올 때 매우 가난했고 여비도 없는 경우가 있었지만 공립협회는 이들의 농장 일자리를 주선하고 숙소, 철도여비도 주었다.

◈ 1907. 3: 1907년 일본과의 신사협정을 맺은 미국정부는 하와이 이민들이 본토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다.

◈ 1912. 7 (대도): 하와이 한인이 미국에 올 수 있느냐는 하와이 동포의 질문에 대한 답변: “하와이 온지 7년 된 증서를 하와이 이민국에 가서 얻어 가지고 미국으로 와 보시오. 그러면 될 줄 아외다. 그러나 돈이 좀 있어야 될 듯 하외다. 몇 사람 먼저 시험하여 보시오.”

초기에 본토로 온 사람들은 한국에 선교사였던 닥터 드류의 도움으로 신체검사에 불합격한 사람은 없었다. 재정보증은 공립협회에서 서 주었는데, 이들은 캘리포니아에서 농사를 짓거나 과일농장에서 일을 했다. 유타나 와이오밍에 석탄광부나 애리조나로 철도인부로 떠나기도 했고 알라스카로 가는 원양어선을 타기도 했다.

한인노동자 본토이동 통계

1910년 미국정부의 인구조사 의하면 하와이 한인은 4천 533명이고 미주 본토의 한인인구는 462명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민국 기록에 1905년부터 1910년까지 하와이에서 미주 본토로 이주한 한인 인구는 1천명이 넘었다고 되어있다. 그 기간에 300명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한국에서 직접 본토로 온 사람이 200명이니 최소한 900명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462명으로 조사되었던 이유는 인구조사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조사하는 사람들이 국적을 제대로 명기하지 못했던 탓도 있겠다. 한인과 일인을 구별하지 못한 그들은 인종 난에 일본사람을 낮춰 부르는 단어 ‘Jap’을 써넣어 일본사람으로 정리됐을 가능성도 보고 있다.

하와이 이민국 자료에 의하면 1905년부터 1907년 사이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 지방으로 건너간 한국인은 1905년에 399명, 1906년에 456명, 1907년에 148명으로 모두 1003명에 달한다. 1907년 3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하와이의 일본인과 한인노동자들을 미국 본토로 이주할 수 없게 하는 시행령 589호를 발포하였다. 그 이후 한인들은 더 이상 본토로 이주하지 못하였다.

자료마다 숫자가 다르지만 정리된 기록들을 보면 하와이에서 본토로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이주한 사람은 남 941명, 여 45명, 아동 29명으로 총 1015명이었다. 1903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에서 캘리포니아로 온 한인은 103명으로 하와이에서 이주한 1900명에 비하여 매우 적었다. 1903년부터 1904년까지는 총 50명이, 1911년 3명, 1912년 7명, 1914년 18명, 1915년 15명이 하와이에서 본토로 이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