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차)미리사(1880-1955):미주 최초의 여성단체 한국 부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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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철저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다. 19살에 딸 하나를 두고 과부가 되었으나 교회에 다니며 기독교 신앙을 가져 어려운 과정을 극복한다. 중국으로 유학을 하여 4년간 신학을 공부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유학 왔으나 미주한인과 함께 공부를 접고, 샌프란시스코에서 1905년에서 1910년까지 활발한 국권회복을 위한 조국 독립과 한인사회 계몽운동에 몸 바쳤다.

김미리사는 당대에 보기 드문 인테리 여성이었다.

1905년 12월 9일에 조직된 ‘대동교육회’와 그것이 개편 확대된 ‘대동보국회’25명 발기인 중 유일한 여성이다. 기관지 ‘대동공보’간행에 중심인물이었다. 본국의 제국신문 ‘뎨국신문’이 재정난으로 휴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주동적으로 앞장서서 의연금을 모아 보냈다.

1908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초의 한인 부인단체 ‘한국 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다. 처음으로 조직한 여성단체를 통해, 한인여성들도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르쳤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느라 부단히 애썼다. 그는 여성들이 사회참여를 통해 애국 애족의 많은 부분을 감당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평안북도 선천에 민족적 사업의 하나로 ‘대동고아원’을 설립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불쌍한 고아를 거두고 양육하여 훌륭한 시민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신념을 대동보국회가 중심 사업으로 택해 많이 도왔다. 부인회, 국민회 그리고 신문사일에 너무 열중하다 과로로 뇌일혈이 생겨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결국 그 후유증으로 거의 듣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1910년에는 캔사스시티로 가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여 교역자 양성 신학교 스카리트 [The 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서 수학하였다. 1912년 미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서는 배화 여학교에서 사감으로 재직했다. 그는 미주에서의 활동 경험을 토대로 1920년 이후 국내에서 여성교육 운동을 이끄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한국근대사에 높이 평가받아야 할 위대한 여성 민족지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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