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용(1896-1976):역사를 증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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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 김원용은 중국 상해에서 1917년 5월 유학으로 미국에 왔으나 처음엔 학업은 미룬 채 애국운동에 가담했다. 오하이오의 대학에 재학 중인 1920년 4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인학생 총회 결성 회의에 발기인 대표로 참가했다. 1923년부터 7년간은 미국 중서부와 동부지방에서 생업에 힘쓰며 독립운동 후원을 위한 지방조직 결성에 노력했다. 1930년 6월 미주대표의 사명을 가지고 재미한족연합회에 참석하고 독립운동강화 촉진을 위한 각 단체 연락사무를 맡아 봉사하였다.

1931년 하와이 대한인 교민단의 기관지인 국민보의 편집인이 되었다. 이승만이 동지회 재정을 충당하려고 교회재산과 교민단 회관을 매각하려하자 이에 반대, 이승만 중심체제를 중단시키고 민족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한인단체 결성을 위해 애썼다. 그 일로 이승만과 사이가 소원해졌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 국민회에서 보증한 여비와 관련, 이승만과 갈등이 일어 법정까지 가게 된다.

천 달러가 넘는 재판 경비를 그를 알고 돕는 한인들이 지불해 줬다. 당시 김원용은 위협을 느껴 한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권총을 소지하고 다녔다고 한다.

김원용은 자신의 역대 임무를 한인사회 조직을 단합하고 모든 역량을 독립운동에 집중시키는 것으로 알았다. 1941년에 결성한 재미한족연합의 중추가 됐으며 해방 후에는 초대입법의원 및 법제사법 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김형제상회에서 출자한 50만 달러 가치의 부동산으로 한인 장학 사업을 만들어 1968년까지 총 30만 달러를 수여했다. 1946년 12월에는 남한과도입법위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 집행위원을 거쳐 1957년에는 한인재단 총무 겸 재무로 봉사했다.

‘해방조선’과 ‘재미한인 50년사’를 저술했다. 특히 1950년대에 8년간 자료 수집을 거쳐 쓴 ‘재미한인50년사’는 그의 괄목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중가주의 부호 김호씨의 재정적 도움으로 가능했던 이 책은 미주한인 역사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65년에는 김형제 상회의 김형순, 김호, 송철 등과 함께 한인회를 결성하였다. 애국애족운동으로 초기 이민의 모범이었다.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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