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림(1884-1973):쌀의 왕으로 불린 큰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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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림은 당시 ‘Rice King(쌀의 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한인 중에 가장 많은 농토를 가지고 경작을 하여 큰돈을 벌었다. 그는 번 돈으로 한인 사회 도처에 필요한 곳은 물론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기부하였고, 비행학교를 설립해 모든 재정을 뒷바라지한 통이 큰 사업가였다. 1916년 당시 윌로우스에서 4천3백 에이커에 벼농사를 지었는데 연 수입규모가 백만 달러가 넘었으며 당시 캐딜락 차를 가지고 있었다.

1918년 1월17일 신한민보 기사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김종림 씨 기계 사라고 200원 기부-‘가주 한인 벼농사의 거백으로 치는 테일로스빌에 사는 김종림 씨는 일전에 샌프란시스코에 들어와서 총회관을 심방 하던 때에 본 년도의 1저의 식자기를 사라고 2백 원을 기부하였소. 처음 이 안을 통과할 때에 미한인 실업가 중에서 각각 얼마씩 차금하기로 정한 바 씨가 이일에 대하여 얼마의 차금을 담당할 것은 믿었거니와 이와 같이 거액의 재정을 기부할 것은 바라지 못하였소. 대저 2백 원의 기부는 저 미 한인의 십 년 기록을 세웠다 하오. 씨가 금년에 얼마의 큰 이익을 있었다 하지만은 이러한 거액을 끄내 내어 노음이 그의 기가 매우 신신한 것은 아직 천지제일이라오”

그는 1918년 3월10일 맥스웰시 백인예배당에서 백 엘리스와 결혼하고 쌔크라멘토 근처 테일로스빌에 있는 자기 집에서 피로연을 가졌는데 부호답게 결혼경비를 5천 달러를 썼다고 한다.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윌로우스에 비행기학교를 세우려는 노백린을 도와서 1920년 비행기 학교에 2만 달러를 내놓았다. 또한 매달 3천 달러씩 지원, 교사의 월급지급 등 운영비용을 댔다. 당시의 화폐가치로 보면 대단한 액수다. 또 1920년에 6월22일에는 실제로 비행기를 구입해 와서 학생들을 실습하게 하였다. 또 당시 김종림은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도 한 번에 가장 많은 의연금인 3천4백 달러를 기부한 사람이기도 했다.

북미시보 1946년 2월15일과 3월1일자는 김종림이 북미시보를 위하여 식자기 주문한 것과 김종림의 자녀 결혼을 보도했다. ‘김진원군과 김로스야의 결혼식 성황’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기사는 캘리포니아의 여러 단체와 함께 북미시보 운영에 가담하고 있는 김종림에 대해 보도했다. 김종림은 정몽룡, 송철과 더불어 북미시보의 확장위원으로 일했다. 김종림이 이루어놓고 그로 인해 추진되었던 독립운동의 업적은 재조명되어야 한다.

정부에서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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