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최고의 여성운동가였던 김혜원은 가족과 함께 1905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했다. 한인으로는 최초로 미주에서 법학박사가 된 강영승의 누나다. 하와이에서는 재봉틀을 사서 바느질을 하고 어머니와 올케는 세탁 일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빨래를 빨아서 풀을 메기고 데려주면 셔츠 하나에 5센트를 받았다. 셋이 열심히 일하면 한 달에 50달러를 벌었는데 동생의 학비를 보내고 나면 근근이 살았다. 바느질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신랑 될 사람이 공부를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1913년 이대위목사 주례로 김성권(흥사단 이사장 역임)과 샌프란시스코에서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바느질을 하여 가사를 돌보았다. 아이가 아파도 병원에 갈 돈이 없어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병원에 갔다. 캘리포니아주 다뉴바로 이사한 뒤 올케 강원신과 포도농장에서 일하고 농장일 하는 사람들의 밥을 지으며 여성독립운동에 참가한다.
1919년 3월2일 다뉴바 지방에서 신한부인회를 조직하고 미주 내 각 여성단체를 통합하여 8월5일에는 다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서 다뉴바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 부인회 친애회,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 한인부인회, 윌로우스지방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인회 합동 발기대회를 개최. 대한여자애국단을 창설하고 초대 총 단장으로 선임됐다.
1930년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의 사업과 흥사단 대한인국민회의 민족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1940년 다시 대한여자애국단 제8대 총 단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와 국민회의 재정을 적극 원조했다. 동포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려 애쓰고 조국의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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