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타린의 왕, 독립의 꽃을 피우다: 김형순(Harry S. Kim)의 위대한 여정

1. 망명자의 아들, 태평양을 건너는 다리가 되다

1886년 5월, 경남 통영의 한 은신처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의 근대화를 꿈꿨던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명이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가족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역적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안고 태어난 소년 김형순은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인천의 이모 댁으로 보내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절망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인천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nes) 목사는 소년의 명석함을 알아보고 영어와 서구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이후 배재학당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그는 1901년 졸업과 동시에 인천세관의 최연소 통역관이 됩니다.


1903년, 겨우 열아홉 살이었던 김형순은 대한제국 수민원의 부름을 받습니다. 하와이로 향하는 첫 번째 공식 이민선에 통역관이자 인솔자로 승선하게 된 것입니다. 낯선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시간당 10센트를 벌며 고된 노동에 시달릴 때,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춘 그는 법정 통역과 노무 관리를 도맡으며 월 400달러라는 파격적인 임금을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미국 사회에서도 상위 1%에 해당하는 고소득이었으나, 그는 이 돈을 개인의 영달이 아닌 고국 동포들을 돌보는 데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 새벽 한 시의 탈출,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이민국 수용소의 시련

1909년, 잠시 귀국한 그는 이화학당의 재원 한덕세와 결혼하고 상해로 건너가 신혼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일제는 그의 탁월한 영어 실력을 간파하고 자신들의 앞잡이 노릇을 할 통역관이 되어달라며 집요하게 회유하고 협박했습니다. 조국을 배신할 수 없었던 김형순은 어느 날 새벽 한 시,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아내와 함께 상해항을 빠져나와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1913년 8월,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한 그를 기다린 것은 환영이 아닌 차가운 감옥이었습니다. 국적 없는 동양인 이민자였던 그는 샌프란시스코 이민국 수용소(엔젤 아일랜드)에 무려 3개월간 구금되었습니다. 이미 하와이에서 엘리트로 인정받았던 그였지만, 본토의 벽은 높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석방 후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한 그는 서른이 다 된 나이에 고등학생들과 섞여 나성고등학교(LA High School)를 다녔습니다.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아내의 음악 레슨비까지 보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치열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3. ‘김브라더스 상회’의 탄생: 농업 혁명과 비즈니스 천재

1921년, 김형순은 인생의 동반자이자 동업자인 김호(Kim Ho)를 만납니다. 중가주의 척박한 땅 리들리(Reedley)에서 두 사람은 ‘김형제 상회(Kim Brothers Co.)’를 설립합니다. 김형순은 단순히 농사를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농업 경영’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그는 UC 데이비스 농대의 전문가들과 협력하여 품종 개량에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껍질에 털이 없어 먹기 편한 복숭아인 ‘넥타린(Nectarine)’과 알이 크고 씨가 작은 ‘김복숭아(Sun Grand Peach)’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는 이 품종들에 대한 특허권을 확보하고 미국 전역에 보급했습니다. 75센트짜리 묘목을 가져와 1년 만에 2달러 50센트에 되파는 마케팅 수완은 미국 주류 사회를 놀라게 했습니다. 1에이커당 200달러에 산 땅을 개간하여 2,000달러에 되파는 부동산 안목까지 더해지며, 그는 중가주 농장지대의 전설적인 ‘과일 왕’으로 우뚝 섰습니다.

4. 나무 위에서 들려오는 아리랑: 따뜻한 고용주이자 후원자

성공의 정점에서 김형순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람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갈 곳 없는 한인 고학생들을 위해 농장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당시 일반 농장보다 훨씬 높은 시급 1달러 40센트를 지급하며 그들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농장 일에 익숙지 않았던 학생들은 종종 나무 위에서 일은 하지 않고 고향 생각에 ‘아리랑’만 소리 높여 부르곤 했습니다. 감독관들이 불평을 늘어놓아도 김형순은 “저들이 부르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조국을 향한 눈물이다”라며 묵인해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한인 사회 최초로 10만 달러라는 거액을 내놓아 장학 재단을 설립했고,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매년 후원금을 보냈습니다. 그의 농장은 단순한 사업장이 아니라, 타향살이에 지친 한인들의 쉼터이자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습니다.

5. 무궁화 훈장보다 빛나는 이름, 영원한 한국인

김형순은 독립운동의 든든한 금고지기였습니다. 중경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밤낮으로 자금을 모았고, 해방 후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미주 한인 사회를 이끌었습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에는 경기도 평택에 ‘꽃동산 애육원’을 세워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등 고국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1962년, 그는 평생 일군 사업체를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140만 달러에 매각했습니다. 은퇴 후 그가 선택한 삶은 다시 ‘봉사’였습니다. LA 한인회관 건립을 위해 1만 달러를 선뜻 기부하고, 90세가 넘는 고령에도 한인 커뮤니티의 크고 작은 일에 앞장섰습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사실은 그가 70년 가까이 미국에 살면서도 끝내 미국 시민권을 받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한국인 김형순’으로 남길 원했습니다. 1977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장례는 온 한인 사회의 애도 속에 ‘대한인국민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세운 리들리 한인 묘지에서, 평생의 동업자이자 사돈이었던 김호와 함께 조국의 앞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털 없는 복숭아 넥타린(Nectarine)


미국인들이 복숭아의 잔털에 특히 알레르기가 심하다는 점에 착안한 그는 조선의 천도복숭아를 염두에 두고 복숭아와 자두를 육종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처음에는 묘목을 판매하던 김형순은 아예 김형제상회(Kim Brothers, Inc.,)를 통해 미 대륙 전역에 넥타린을 판매함으로써 미주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Comments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