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백린(1875-1926):윌로우스 비행학교

계원 노백린은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뛰어나 주위로부터 장군감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상경하여 1895년 정부에서 뽑는 전국의 수재 120인에 뽑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간다. 이갑, 유동열, 윤치성과 일본에서 경응의숙을 졸업했다.

그 해에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의 정변이 일어나고 친일당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정부에서는 유학생들에게도 역당의 누명을 씌워 학비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뜻을 더욱 굳게 먹은 노백린은 더욱 면학하여 1898년 합성학교를 졸업했다. 이듬해 11월에는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1900년 귀국하여 민영환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윤치성 등과 같이 육군 참사에 임관되어 한국 무관학교 교관으로 후진양성에 정열을 바쳤다. 1904년 노일전쟁 때 장군은 관전사가 되어 만주 등지를 시찰하고 육군무관학교장, 육군연성학교장 등 군의 요직을 역임하며 국군육성에 진력했다.

1907년 8월1일 한국군대 해산이라는 치욕을 맞자 군대의 적을 버리고 교육계에 투신하여 보성학교 교장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피혁사업과 식료품점, 금광, 철공소 등의 사업을 하기도 하였는데 군사침략과 마찬가지로 위험시되었던 경제침략을 막는 민족산업 진흥을 위해 애썼다. 국권을 잃은 것을 탄식하던 그는 안창호, 이갑, 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고향 송화에는 광무학당을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김구 등과 같이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였고 1910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해 6월 박용만과 하와이에 국민군단을 창설하고 300 여명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통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군인출신이던 그는 독립운동 노선도 전투를 통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독립전쟁론자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 이어 제2대 군무부 총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이동휘, 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는 앞으로의 전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승리가 있다고 믿고 1920년 2월 20일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공군양성을 위한 비행사양성소를 북가주 새크라멘토 근처 윌로우스에 설립했다. 부호 김종림의 적극적인 재정적 지원에 힘입었다.

1920년 1월 전 국민에게 광복군 전투대열에 참가를 당부하는 군무부 포고 제1호를 발표하는 등 미주지역에 거하면서도 광복군의 전투를 지원하는데 혼혈을 기울였다. 1921년 7월 윌로우스를 떠나 상해로 돌아갔다. 당시 임시정부는 통합 과정에서 독립운동 노선 차이 등으로 네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문창범을 중심으로 하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박용만, 신채호를 중심으로 하는 북경의 군사 통일회,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한인 사회당, 안창호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유지파 등이었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 김규식, 노백린이 상해로 떠난 데는 분파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1922년 6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지명으로 국무총리로 추대되어 1924년 4월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용감한 군인인 동시에 지조와 열정의 독립 운동가였던 그는 1925년 1월22일 상해에서 52세로 병사했다. 장군은 죽을 때까지 한국군복을 착용하여 한국 군인으로서의 긍지를 고수했다. 장군의 묘지는 상해 만국공묘에 안치되어 있다가 1993년 임정요인 유해 봉환시 국내로 옮겨졌다. 1962년 3월1일 건국공로 대통령 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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