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의 사상과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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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의 정신과 사상은 ‘진실 되자, 일하자, 사랑하자’로 표현된다. 사람은 첫째로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 남의 본보기가 될 만한 진실 된 도덕적 품성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둘째로, 건전한 인격은 한 가지 이상의 전문지식과 생산 기능을 가진 생산적 직업인이어야 하며 셋째는, 튼튼한 신체를 가지도록 하고 우선 몸가짐과 거처로부터 개조하여 새롭게 되지 않고는 독립국민이 되지 못한다고 믿었다. ‘아무렇게나’ ‘어물쩍’ ‘되는대로’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도산은 그런 것이 거짓과 한 통속이라며 조국을 망하게 한 원수라고까지 비판했다. ‘그렇소’ ‘아니오’를 분명히 하여 ‘글쎄’라는 것은 없었다.

그는 인생 전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후반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바쳤다.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해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라는 애국 애족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다. 그는 생각을 몸으로 직접 실천하는 성실한 자세와 정직한 마음씨의 인격적인 지도자였다. 도산은 청년들에게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가르쳤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살아 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처럼 도산은 일생을 통해 조국을 위해 분투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또한 사랑을 통해서만 조화와 통일을 이룰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며 정의돈수와 신성단결을 역설했다.

도산은 항상 “서로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대하는 사회가 그립다”라고 말했으며 자신이 먼저 웃음을 머금었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명상과 기도로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고 민족의 번영을 기원하는 ‘염 조선’을 했다. 도산의 꿈은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을 세계가 존경받는 민족으로 만들고 우리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만드는데 있었다. 모든 기관을 갖춘 집단부락을 곳곳에 세워 집단생활과 사교생활을 통해 가족적 이기주의를 벗고 민족의 사회적 습관과 예의와 소망을 이뤄나가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

도산은 그의 지지자들에게 민족주의, 조직, 교육, 산업주의 등 4가지를 명심하라고 가르쳤다. 민족주의는 독립정신을 일으키는 것이라 하였고 조직은 개인의 정신을 안정시키고 또한 행동을 위한 계획을 제공하고 산업주의는 스스로 충분한 개인을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또 무실, 역행, 충의, 용맹의 4가지 덕목을 강조했다. 인류의 희망과 최종 목표는 인류의 완전한 행복으로, 이 행복의 어머니는 문명이고 문명은 사람이 개조하는 일에 노력함으로 얻을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사람이 일생에 힘써 할 일은 개조하는 일이고 성경의 회개도 개조라고 했다.

도산 안창호가 거주하던 LA 집

도산의 편지

1924년 안창호가 상해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시켜 쓴 글이 동광지에 연재됐다. 이 글들은 1924년에 쓴 것으로 갑자년에 씌어져 ‘갑자논설’이라고 한다. 일본 측에 의해 부분삭제 및 연재 금지를 당하였는데 삭제된 것은 해방 후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1924년 ‘동포에게 드리는 편지’>

(북경에서 이광수를 만나 구술로 한 편지)

“(생략) 오늘 우리 대한을 보면 합해야 되겠다하면서 어찌하여 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짓는가 왜 싸움만 하는가하고 서로 원망하고 서로 꾸짖는 소리가 대한 천지에 가득 찼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 대한 사람은 합동적이 아니오 분리적인 것을 알 것이요. 또 오늘날 대한사람은 합동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합니다. 그런즉 우리 무리는 이 합동에 대하여 주인 된 자의 자격으로 책임을 지고 합동의 방법을 연구하며 합동하는 행위를 실천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동포에게 고하는 글(1925년 1월23일): 지금 말하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여 전달될 만한 한도 내에서 몇 가지를 묻고 말하고자 합니다.”

“비관적인가 낙관적인가(동아 1925년 1월 24일): 시국과 상황을 큰 문제로 삼지 않고 일제히 분발하여 의로운 자격으로 의로운 목적을 굳게 세우고 의로운 일을 꾸준히 이루어 나가면 성공이 있을 줄 확실히 믿기 때문에 비관은 없고 낙관뿐입니다.”

“불평과 측은(1925년 1월 25일):우리는 사회에 대해 불평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에 이를 측은하게 보는 방향으로 돌려야한다.”

“주인인가 나그네인가(동광 1926년 6월): 민족사회에서 스스로 믿고 있는 자는 주인이요 책임감이 없는 자는 나그네다.”

“합동과 분리(동광 1926년 5월 6월): 우리민족하고 부를 때 벌써 민족적 감정을 기초로 한 합동은 자연적 습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합동할 조건 첫째는 목적이오 둘째는 목적 달성을 위한 방침과 계획으로 각 개인의 머릿속에 방침과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지도자(동광 1926년 5월 6월): 우리 민족사회의 정도가 낮다면 오늘의 형편에 지도자, 위인이란 마음으로 위인의 일을 하는 자가 위인이다.”

“지도자를 택할 때는(동광 1926년 5월, 6월, 8월) 가깝고 멀고 네 파 내 파라는 관념을 떠나 전 군중의 이해를 기준으로 하고 공평 정직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부허와 착실(1926년 9월 동광): 부허는 패망의 근본이요 착실은 성공의 기초, 부허는 인과의 원칙을 무시하고 정당한 계산과 노력은 하지 않고 요행수만 바라고 예외적 행동으로 덤비는 것이다.”

“오늘 할 일은(1926년 11월 호): 오늘에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큰일은 우리의 몸을 고치고 우리의 가정을 고치는 것으로 우리가 경영하는 모든 일이 이 두 가지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한 학생(동광 1926년 12월): 인류 사회의 생존은 사람의 활동에 있고 사람의 활동할 무기를 잘 준비함에 있으며 이 무기를 예비하는 자가 곧 학생이다.”

“청년의 용단력과 인내력(동광 1927년 1월): 대한의 청년에게 공이나 사로 막혀있는 큰 원수 이것은 곧 방황과 주저이다. 할까 말까 하다가 말까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방황이요 주저이다.”

“사업에 대한 책임감(동광 1927년 2월): 사업의 목적은 결국 우리 사회의 삶을 위함이다. 가치가 있고 없고의 측정은 자기의 몸과 집에 대한 책임이 있고 자기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주인의 관념이 있은 후에야 정도가 되고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업에는 공적 사업과 사적 사업이 있어 자기의 몸이나 집을 위하여 하는 사업은 사적 사업이요 국가나 민족이나 인류를 위하여 하는 사업은 공적 사업이다 다 필요하고 서로 떠나지 못할 관계이므로 누구든지 놀면서 입고 놀면서 먹지 말고 오직 공과 사이 두 가지가 함께 다 서게 하라.”

“청년에게 호소함(동광 1931년 2월):가장 먼저하고 가장 힘쓸 것-인격훈련과 단결훈련”

“세상의 모든 일은 힘의 산물이다 힘이 없으면 일은 하나도 이룰 수 없다.(흥사단보 1946년 7월): 조직에 합당한 지식 조직에 합당한 신의 이것을 갖춘 인격이 없는 것이 하나의 큰 원인이다. 무정한 사회와 유정한 사회에서 우리가 사회를 개조하려면 먼저 다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정의를 기르는 공부를 하여 참 삶의 맛을 알게 될 것이다. 정의를 기르는데 주의 할 것은 남의 일에 개의치 말고 개성을 존중하라. 자유를 침범치 말라. 물질의 부탁을 하지 말라. 정의를 혼동치 마라. 신의를 확실히 지켜라. 예절을 존중하라.”

“나의 사랑하는 아내 혜련(1933년 6월 1일): 사랑, 이것이 인생에서 밟아 나갈 최고의 진리요 인생의 모든 행복은 인류간이 화평에서 나오고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오. 사랑을 믿고 사랑을 품고 사랑을 행하는 그 사람자신의 마음은 비상한 화평 속에 있으므로 남이 헤아리지 못할 무한한 행복을 받을 것이오.”

“나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가정의 행복을 희생한 지도 오래되었소. 뿐만 아니라 당신도 우리 민족을 위하여 희생을 당하는 바요. 오! 혜련! 나를 충신으로 사랑하는 혜련! (중략)나의 몸을 이미 우리 국가와 민족에게 바쳤으니 이 몸은 민족을 위하여 쓸 수밖에 없는 몸이라 당신에게 대한 직분을 마음대로 못하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필립: 좋은 사람 되는 법은 좋은 친구를 잘 가리어 사귀며 좋은 책을 잘 가리어 보는 두 가지가 매우 요긴하다. -네 아버지가 중국 홍콩에서”

“나의 사랑하는 딸 수잔: 너희들도 매우 바쁘겠지만 뜰을 깨끗하게 거두고 화초를 잘 길러라. 이것도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좋은 습관을 양성하는 한 과정이다.”

도산과 미주 인사들 간의 서신교환

도산은 미주지역 인사들과의 서한에서 주로 공적인 업무에서 파생된 문제를 거론했다. 또한 사적인 내용에서는 수신자의 삶과 애국정신을 격려했다. 도산에게 편지한 이들은 자신들의 진로나 장래를 상의하고 생활에서 오는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재정적 지원이나 지극히 사적인 부탁을 한 이들도 있다. 강명화와 강영소, 강영대는 부자간으로 대한인국민회 조직에 큰 공헌을 한 이들이다. 강명화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일을 맡았다. 1912년에는 대한인국민회 활동을 접고 개인 사업에 치중하였는데 그의 아들들이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에서 중임을 맡아 개인적 희생이 너무 크자 그 불만을 서한을 통해 드러냈다. 특히 신한민보의 중임을 맡은 강영소가 병이 나고 강영대가 학업을 포기하자 이들을 독립운동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했다. 이를 안 강영대는 자신이 학업을 포기한 것과 강영소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고 있는 것은 국민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며 오히려 도산에게 부친의 실수를 사과하는 서한을 보냈다.

곽림대의 서한 중에는 그가 흥사단 검사직을 수행할 때 단원의 의무사항인 통상보고를 하지 않는다고 안창호에게 1개월 정권처분을 통보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백일규는 독립금 마련에 노력했으나 그 금액이 예상에 미치지 못해 송구하다는 서신을 보냈다.

송종익은 안창호가 상해로 간 이후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운영을 중심이 되어 맡아 했는데 흥사단과 북미실업주식회사 운영문제를 상의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이래 흥사단원으로 활약한 양주은은 안창호와 서신을 자주 주고받았다. 흥사단 창립멤버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약한 염만석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인정황을 도산에게 서신으로 알렸다. 1915년 인터타입 한글식자기를 발명한 이 대위는, 일제가 국문주자제조 및 발매금지법을 제정한 것에 대해 국문 발달을 위한 국문주자회사의 설립을 건의하는 편지를 도산에게 보냈다.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운동자금 마련에 큰 역할을 한 임준기는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지도하며 농업경영관계를 알렸다. 중국과 러시아의 인사들의 보고를 받은 최정익은 번호를 매겨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공식적인 서한을 보냈다. 1910년대 이승만은 안창호의 안부를 묻고 가르침을 달라는 서신을 보냈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임명된 뒤에는 안창호가 영향력을 발휘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1911년 신한민보 주필로 초대되어 북미로 건너와 흥사단 창립멤버로 흥사단 조직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한 홍언은 도산의 딸 안수산의 이름을 지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의 서신은 도산의 가족과 돈독한 유대를 보여준다. 미주지역의 서한의 주인공들은 노동자, 농민들도 많았는데 미국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 피나는 노력 속에도 깊은 애국심을 품고 조국의 부름을 기다린다는내용이 주였다. 흥사단 창립멤버이며 농장경영 대부호 김종림은 벼농사와 관련된 여러 정황을 알리고 독립운동 자금마련 문제를 안창호와 의논했다.

천부적인 명 연설가 도산

도산은 일찍이 훌륭한 연설가, 웅변가로 명성이 높았다.

1898년 7월 25일 광무황제의 생일을 맞아 독립협회 평양지부에서 ‘쾌재정’이라는 정자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21세의 도산은 당시 연설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쾌한 일과 불쾌한 사정을 들어 일반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감탄했다. 이때부터 도산의 명연설은 시작됐다.

도산의 연설이 있다고 하면 회의장은 늘 터지도록 만원이 됐다. 그의 풍성한 신지식과 논리적인 설득력, 정열로 넘치는 극진한 애국정신이 듬뿍 담긴 연설은 듣는 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도산은 세계가 민족경쟁시대라는 것, 독립한 국가 없이 민족이 서지 못하고 개인이 없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 분발 수양하여 도덕적으로 거짓 없는 인격을 갖추고 지식적으로 기술적으로 유능한 인재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주로 삼았다. 도산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웅대하고 폭이 넓고 물이 용 출하고 산이 솟아나는 듯하였다”고 평했다. 도산은 언제나 “대한의 남자여, 여자여”라고 서두를 시작했다. 정부의 무기력을 한탄하고 민족의 결함을 척결하자고 호소하고, 지금 깨달아 스스로 고치지 않으면 망국을 누가 막겠느냐고 연설을 하면 만장이 흐느껴 울었다. 도산의 연설은 제목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예를 들어주어 그 의의를 명확히 가르쳐주고, 그렇게 함으로서 생기는 결과를 지적하는 식이었다.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하였고 때때로 간단하고 적합한 비유와 유머를 섞어 지루함이 없게 하였다.

대중적인 명 연설가로는 1907년 2월 귀국하여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 3년간이 그 절정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식 후 1908년 10월 흥사단 단원에게 ‘전쟁종결과 우리의 할 일’이라는 연설문을 발표했다. “…… 우리가 참으로 원하는 대동단결을 이루고저 하면, 형세 밖의 일을 몽상하다가 몽상대로 아니 된다고 낙심하지 말고, 다수 동포가 상식이 자라도록 중추력이 생겨지도록, 위대한 인물이 발현되도록, 노력에 노력을 더함이 가하다 하노라”

1919년 3월 13일 대한인국민회의에서는 ‘삼일운동을 위한 계승’을 연설하고, 국민회 총회장으로는 ‘재산과 생명을 아울러 희생하자’고 호소했다. 그의 연설은 언제나 희망적이었다. “우리가 하려고만 하면 반드시 우리나라를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하고 끝에는 “대한독립만세”를 청중들과 함께 외쳐 나라 잃은 국민에게 새로운 기운을 일으켰다. 남강 이승훈은 “나라가 없고서 일가와 일신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를 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가 없소”라는 도산의 연설을 듣고 그날로 상투를 자르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산학교를 세웠다.

도산이 다시 미국에 와서 1924년 12월 25일 동포들이 마련한 환영식장에서 “샌프란시스코에 계신 동포의 유일한 책임은 모여 서로서로 사랑하여 샌프란시스코 공기를 따뜻하게 하며, 새크라멘토에 계신 동포나 스탁톤에 계신 동포나 어디에 계신 동포나 다 막론하고 서로서로 사랑하여 전 민족의 공기가 따뜻하게 되면, 이것이 우리 장래 성공에 무엇보다도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라고 연설했다. 그는 동포들끼리의 사랑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도산의 연설은 학교에서 가장 많이 열렸다. 1907년 4월 27일 만월대에서 군민연합운동회 연설회에는 2천여 명이 모였으며 7월 8일 평양 연설회에는 3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1907년 균명 학교 연설에서는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아침마다 학교에서 국기를 게양할 것과 애국가를 제창할 것을 제안했다. 도산의 연설은 독특하여 실생활과 관계있는 상업육성, 가옥개량, 운동장 설치, 모범농장 설립, 학도의 해외파견 그리고 의무교육 실시 등을 소재로 삼았다.

그의 연설은 보통 2시간 이상 계속됐다. 1908년 2월 8일 대한협회 주최의 한 연설은 무려 3시간 50분 동안 계속됐다. 도산의 연설회를 취재한 한 기자는 그의 연설은 글로도 입으로도 능히 옮길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극찬했다. 1908년 6월 14일부터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도산 연설을 ‘안씨 연설’로 독립 기재하였다.

일본인 형사가 도산의 연설을 필기하다 눈물을 흘리면서 “선생의 명령만 있다면 사를 버리고 오직 복종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 하겠다”고 했다는 등 그의 연설에 관한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도산의 공식적 국내연설은 1909년 1월 14일 청년회관(YMCA)에서의 ‘전제와 희망’이라는 연설이 마지막이었다.

도산은 우리겨레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과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 영원히 번영을 누릴 길을 깊고 구체적으로 연구한 사람이다. 그는 독립의 유일한 길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믿고 독립전쟁 준비론을 정립했다. 독립 후에는 자유롭게 모두 잘살 수 있는 민주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민족을 위한 인물양성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도산은 학교를 세우고 지, 덕, 체를 골고루 갖춘 건전한 인격자를 배양하는데 힘썼다. 흥사단 운동도 이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조국을 살리는 길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력이라는 것을 역설하여 산업을 진흥함이 곧 애국이요 구국이라고 하고 경제적 침략이 군사적 침략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인식케 하려고 노력했다.

또 도산은 민족의 정신과 문화 보급을 위해 출판 사업을 중요시하여 “책사(서점)도 학교다. 책은 교사다. 책사는 더 무서운 학교요, 책은 더 무서운 교사다”라고 평소 말했다. 서적과 출판물이 민족 힘의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믿었다. 도산은 민족향상 운동이 도덕운동에 중심을 두는 것이라며 정치와는 분명한 구분을 두었다. 정치로 인한 일시적 오르내림보다는 민족의 진정한 역량을 키울 때 민족의 영원한 생명이 보존된다고 역설했다. 도산은 대화와 오락도 중요시 여겼는데, 단체생활에서 서로 지식을 얻어 덕을 모으고 웃음과 기쁨을 함께 분담하여 전체가 즐거워하자는 뜻이었다.

정신여자학교를 나온 도산의 부인 헬렌(혜련)은 남편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전심전력을 쏟는 만큼, 자신도 일생을 희생적 정신으로 살았다. 부인은 결혼 후 도산에게 “당신은 국가에 속한 사람이니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의 남편 도움 없이 3남 2녀를 양육하며 힘든 일생을 살았다.

1905년에 장남 필립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수많은 미국 출생 한인 2세 중 제1호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평생을 총각으로 지내며 40여 년간 할리우드에서 3백여 편의 영화와 TV에 출연하여 동양인의 이미지를 크게 부각시켰다. 차남 필선은 화학을 공부해 휴즈 항공에 30년간 근무한 그 분야의 전문가였다.

삼남 필영은 아버지가 상해로 떠난 뒤인 1926년에 출생하여 아버지를 영영 보지를 못했다. 2차 세계대전 때 해군사병으로 복무했으며 칼 스테이트 LA 대학시절 풋볼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형과 함께 Moongate 식당경영에 참여했다. 장녀 수산은 미 해군 소위로 입대, 대위시절 전투기 사격을 가르친 첫 동양계 여성 장교였다. 차녀 수라는 남가주 대학을 졸업하고 쇼셜 워커로 사회에 봉사하였다.

필립과 함께 30년간 Moongate를 경영했다.

도산이 세운 단체 및 기관

친목회, 흥사단, 상항 친목회, 공립협회, 신민회, 청년학우회, 수양동우회, 평양 대성학교, 흥사단, 북미실업주식회사, 남경에 동명학원, 국민회, 대한인국민회

교육 / 오산학교, 대성학교, 보창 학교, 양실학교, 신안학교,

가명학교 등 수십 개의 학교

산업 / 평양 자기제조주식회사, 상무도사 협성동사, 방직회사,

연초공장, 광산업

출판 / 태극서관, 조선 광문회, 안악면려학회

학술회 / 1907년부터 1908년까지 5개 설립.

도산의 일기와 자료 및 그와 관련된 문건은 봉투나 메모지 한 장조차 흐트러짐 없이 도산의 부인이 도산 생존 시는 물론 작고 후에도 잘 보관해 두었다. 이 자료는 독립기념관과 기념 사업회에 그대로 기증되어 한국민족운동 또는 독립운동사 연구에 더 없이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도산의 일기는 1902년 유학으로 미국에 갈 때 쓴 것(6.25 전쟁 때 화재로 인해 소실)과 상해 임시정부에서 각료로 활동할 때 쓴 것(1920년 1월부터 8월까지 약 8개월 분량)으로 나눌 수 있다.

일기는 가로 20센티, 세로 27.5센티 크기의 양지에 일자별로 빼곡하게 기록했다. 26년 임시정부 존속기간동안 일기를 남긴 인사는 도산이 유일하다. 초창기 임시정부의 활동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다. 흥사단에 관련된 내용도 많고 북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세울 무렵 상해에서 비행기 구입을 추진한 일기도 있다. 그는 비행기 구입을 추진함과 동시에 비행기를 조정 할 수 있는 비행사를 구하기도 하였다. 당시 비행학교 재정지원과 운영에 깊게 관계한 김종림과 노백린을 비롯하여 교관 한장호, 학생 오림하, 장병훈, 이용근이 흥사단 단원이므로 서로 연계가 있었다. 도산의 일기는 국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누군가가 대신해서 정리한 것이 아닌가하는 학계의 의견이 있다.

도산은 많은 국내외 인사들을 만나면서 면담한 인물의 이름과 담화내용을 기록해 두었는데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던 독립운동의 상황, 그리고 흥사단 관련된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다. 도산이 평생 관여한 민족독립운동, 기타 활동, 한말 일제하의 독립운동 전체를 볼 수 있는 자료 등을 본인과 부인 이혜련 여사가 정리 보관했다.

도산 기념사업

1947 도산 안창호선생 기념 사업회 창립

1962 대한민국정부는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1969. 4.21.미국에서 부인 이혜련 여사 별세.

1973.11.10 도산 탄신 95주기와 흥사단 창립 60주년을 맞아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던 도산 유해와 미국 이혜련 여사 유해가 도산공원으로 이장하여 합장함. 청담동에서 논현동에 이르는 신설가로를 도산대로로 명명

1985. 3. 9 도산사상연구회 창립

1986. 12. 5 서울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자리에 도산회관 건립

1994. 2. 3 로스앤젤레스 제퍼슨가에 위치한 대한인국회 총 회관 앞에 로스앤젤레스 시의 허가를 얻어 1368 제퍼슨가에 ‘도산 안창호 광장’ 조성. 서울 강남과 자매도시 리버사이드에 동상 건립

1998년 도산의 유해를 강남구 신사동 649-9 번지에 조성된 도산 공원으로 이장

2003년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 소재 한 연방우체국의 이름을 ‘도산 안창호 우체국’으로 명명하는 다이앤 왓슨 미국 하원의원이 주창한 법안이 연방의회에서 통과됐다. 2004년 9월 18일 오전 10시 LA 한인 타운 내 6가와 하버드(3751 W 6Th St.)에 ‘도산 안창호 우체국’의 현판식이 있었다.

케빈 머레이 상원의원이 제출한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 명명 결의안’이 통과되어 2004년 6월 11일 ‘Dosan Ahn Chang Ho Memorial Interchange’가 로스앤젤레스 10번 프리웨이와 110번 프리웨이가 만나는 곳에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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