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군단을 창설한 우성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의 양반계급 출신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에 의해 양육됐다. 일본에 건너가 중학교와 게이오 의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박영효 등 개혁파 인사들과 사귀어 정당에 가입했다.
그로 인해 관헌에 체포되었다가 몇 개월 만에 석방됐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박용만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중견간부가 됐다.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활동을 하며 민족계몽운동조직인 ‘보안회’를 이끌다 일본경찰에 의해 투옥됐다. 감옥에서 이승만과 정순만을 만나 박용만 까지 ‘삼만’은 의형제를 맺었다. 상동 감리교회의 전덕기 목사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905년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처음 호놀룰루로 오면서 이승만이 15세 때 동갑내기 음죽 박씨와 결혼해 낳은 7살짜리 아들 7대 독자 봉수를 데리고 왔다. 당시 이승만은 동부에서 공부 중이라 아들을 미국인 집에 맡겨두었는데 미국에 온지 1년 만에 디프테리아에 걸려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했다.
박용만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려 했으나 안창호 중심의 공립협회가 포진하고 있어 그들과의 경쟁을 피해 덴버로 갔다. 그곳에서 삼촌인 박장현이 경영하던 한인들을 위한 직업소개소와 여관에서 삼촌을 도왔다. 대륙횡단철도 공사장 인부일도 하고 광산에서도 일을 하던 그는, 덴버 예비학교에서 공부하고 네브라스카 주의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정치와 군사학을 공부했다.
1909년 7월 군사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교장으로부터 한국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켜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 네브라스카 ‘한인소년병학교’를 창설했다. 27명의 학생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고 1912년에는 3년간 훈련을 끝낸 13명의 한인 사관을 졸업시켰다.
이승만이 그 날 축하연설을 했는데, 소년병학교는 1914년까지 백여 명의 사관생도를 배출했다. 그러나 박용만이 하와이로 떠난 후 2년여 간 지속되다 폐교됐다.
1911년 2월부터 샌프란시스코 신한민보 주필을 1년간 역임하고 4월에는 신한민보에서 ‘국민 개병설’을 출판했다. 독립’이라는 신문에 박용만이 기고해 10회 연재됐던 내용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부국강병을 위해 국민들이 납세의무와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족의식이 강한 자원자들로 구성된 군사력을 가진 수비대 조직을 제창했다. 1912년 6월 네브라스카 주립대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7월에는 ‘국민수지’를 저술했다. 졸업 후 하와이로 가서 ‘신한국보’ 편집장이 됐다.
1912년 11월 8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설립되었을 때 선포문을 기초했다. 1914년 6월 하와이 마후마누에 국민회 도움으로 한인군사학교 ‘대조선국민군단’훈련소를 창설했다. 독립군 무관을 양성할 목적의 이 학교는 예산이 7만8천 달러에 달했고 103명의 젊은이가 입교했다. 미주 군사훈련 방면 제1인자였던 그는 조국의 독립은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군인을 양성할 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제도는 미군제도를 따랐으나 실총은 사용하지 못하고 목총으로 대신했다. 전성기 때는 학생 수가 331명까지 늘어났다.
‘산 너머 아이들’ 또는 ‘우리 독립군’이라고 불린 그들은, 파인애플 농장에 기숙하면서 병영을 만들고 군복을 착용했으며 병영입구에 아치스타일의 문도 세웠다. 원래 미국 통치령 내에서는 외국인들의 군사훈령 활동이 일체 허락되지 않았으나 하와이 군사령부는 묵인해 주었다. 청년 훈련병들은 뜨거운 농장에서 10시간이상 노동을 한 후 목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고된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시 한인사회에서는 이들이 행한 군대식 보건체조가 유행하기도 했다.
1914년 8월 29일 국치일에 군단의 영사 건축을 완성하고 600여 명의 동포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낙성식을 가졌다. 그러나 박용만의 군사력 신념은, 외교를 제일로 여기는 이승만의 생각과 대립되어 점점 갈등과 충돌이 심화됐다. 이로 인해 하와이 한인들은 박용만파와 이승만파로 나뉘는 양상을 띠게 됐다. 결국 2년여 만에 군사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다. 직접적인 동기는 파인애플 농장이 토질이 좋지 않아 농사를 폐지하기 때문이었다고 하나, 내면적으로는 이승만과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승만 측은 박용만의 군단학교가 성하여져 기부금이 나뉘고 본인의 교육 사업에 지장이 되자, 미국 내의 군사훈련은 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비난했다.
하와이 한인들이 내는 기부금으로 이승만과 국민회 간에 갈등이 생기자 이승만은 국민회 총회관의 건립 재정문제를 걸고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무혐의로 풀려난 당시 국민회 회장 김종학은 자살미수까지 했다. 박용만의 국민군단 사업도 금전문제로 풍파를 겪었다. 이승만 측은 “박용만의 패당이 미국 영토 안에서 한국 군단을 설립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며, 일부 분자들은 일본 군함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고 음모하니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 사건을 유발하여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이니 조처하여 달라”고 하와이 경찰청에 고소까지 했다. 안창호가 이러한 하와이 분규해결을 위해 1915년 1월 15일 호놀룰루 도착했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결국 박용만의 지지 세력이 약화되고 하와이 정부 비협조와 일본의 방해공작 등으로 1916년 군사학교 기지까지 잃고 폐지해야 하는 아픔을 맛본다. 박용만은 샌프란시스코로 왔다가 하와이로 돌아가 1918년 11월 ‘태평양 시사’를 창간해 주필이 된다. 3.1 운동이 일어난 그 달에 하와이에서 국내, 만주, 연해주, 중국의 구국단체와 제휴를 하고 ‘대조선 독립단’을 창설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이 되었으나 이승만이 외교와 청원으로만 독립운동을 하려는 것을 알고는 취임하지 않았다. 박용만은 평생 소원이던 군사훈련과 군사행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서 대본공사를 세우고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노백린은 박용만과 상의한 뒤 1920년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한인 비행사 양성소를 만들었다. 군인이고 학자였던 박용만은 하와이 국민회의 최고 지도자로 기독교 정신으로 살았으며 한글교육을 강조하였다. 1927년 초등 국어교과서를 편찬했다. 중국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불철주야 뛰던 박용만은 1928년 10월 17일 47세의 한창 나이에 북경에서 암살범에게 총 세 발을 맞고 운명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면서 그의 독립운동 활약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가려지고 말았다. 여러 문헌으로 볼 때 박용만의 공로가 과소 평가됐으며 이제라도 그의 충정어린 독립운동 활약상이 재조명돼야 한다.
정부에서는 1995년 대통령 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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