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겸(1881년 7월 25일~1955년 12월 8일)은 평양에서 태어나 1903년, 23세의 나이에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고된 노동 속에서 그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었고, 결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학업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곳에서 안창호를 만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후 평생을 독립운동과 사업에 헌신하며 기록을 남겼다.
독립운동의 길
1905년, 방사겸은 장경과 함께 대동교육회를 창립하고 한인들의 교육과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 등지에 지방회를 조직하고, 한인들의 단결을 위해 힘썼다.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많아지자, 대동교육회는 대동보국회로 발전하였고, 그는 순찰대원으로 활동하며 조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1908년, 장인환과 전명운이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방사겸은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의 합동을 적극 주장하며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데 앞장섰다. 결국 1909년, 공립협회와 합성협회가 국민회로 통합되었고, 1910년에는 대동보국회와 합쳐져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었다.
그는 이후 시카고에서 한국독립연구회를 창립하여 간사로 활동하고, 1931년과 1944년에는 신한민보와 북미시보에 사설을 게재하며 재미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평생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며 이승만을 후원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사업과 가정
방사겸은 인삼 장사를 통해 자금을 마련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시카고에서 공부를 마친 후, 장경과 함께 남양군도와 호주로 인삼을 판매하고 멀리 쿠바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미주리에서 찹수이 홀세일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국식 식당을 운영하며 10남매의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1916년, 그는 사진혼인을 통해 방살로매와 결혼했다. 방살로매는 18세에 간도에서 회령까지 나가 사진을 찍어 35세의 노총각 방사겸에게 보냈고, 일본 관헌에 의해 한때 미국행이 좌절되었으나, 방사겸은 1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선창에서 기다리며 끝내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후 북가주 새크라멘토에서 살다가 스탁톤으로 이주하여 호텔과 식당을 운영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83에이커의 농지를 사서 벼농사를 지었으나 홍수와 쌀값 폭락으로 큰 손실을 입었고, 다시 20년간 식당을 운영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후반기 삶과 기록
1950년, 방사겸은 세인트루이스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그가 오랫동안 후원해 온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크게 기뻐하며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한국 정치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며 크게 상심했다.
그는 말년 3년 동안 평생을 기록한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7권의 노트에 미주 한인사회의 반세기를 담아냈다. 독립기념관은 2006년, 그의 평생 일기를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총서 제21집’으로 발간하며 그의 공적을 기렸다. 그의 부인 방살로매 여사는 1977년 인터뷰에서 “40년간 남편은 미국에서 장사하며 돈을 벌어 독립운동에 기부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라고 회고했다.
1955년 12월 8일, 방사겸은 로스앤젤레스에서 7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10남매 중 셋째 아들 Young Bahng은 패서디나에서 거주하며 가족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방사겸은 독립운동과 사업을 병행하며 민족의 미래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그의 삶은 미주 한인 이민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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