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겸(1881-1955):미주 한인 반세기 기록

평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방사겸은 1903년 23세에 첫 이민 배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했다. 노동만 하자니 희망이 없어 공부에 뜻을 두고 샌프란시스코에 왔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기숙사에는 10명 정도가 유숙하였는데 그곳 모임에 온 안창호를 만나 독립운동 일을 하게 되었다.

장경과 함께 패사디나로 가서 대동교육회를 조직하고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 등지에 지방회를 조직했다.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한인이 많아지자 총회는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지고 명칭도 대동보국회로 고쳐졌는데 이 단체 소속 순찰대원으로 일했다.

그는 하반에 사는 중국 사람들에게 인삼을 팔아 수천 달러를 벌었으며 시카고에서 공부를 했다. 사진혼인으로 맞이한 부인 방살로매는 18세 때 간도에 살면서 1백30리나 되는 회령까지 나가 사진을 찍어 35세의 노총각 방사겸에게 보냈다고 한다.

1915년 미국으로 떠나려던 방살로매는 일본 관헌에 붙잡혀 못 오게 되고 방사겸은 오클랜드의 가정집에서 머슴으로 일을 하며 샌프란시스코 선창으로 나가 1년 내내 기다렸다. 1916년 3월18일 상항 한국인감리교회에서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북가주 새크라멘토에서 살다가 스탁톤에 정착하여 호텔과 식당을 경영하며 돈을 모았다. 83에이커를 사서 벼농사를 지었는데 홍수에다 1차 대전이 끝나면서 쌀값이 폭락하여 큰 손실을 안았다. 그 뒤 다시 20년 이상 식당 경영으로 일어난 방사겸은 해방된 조국의 정치가 잘못되자 이를 몹시 속상해했다. 딸 다섯에 아들 다섯의 10남매를 잘 키우고 1955년 7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별세 전 3년 동안 일기형식으로 미주 한인사회의 반세기를 기록해 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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