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2월 15일 일제는 한국정부로 하여금 “해외한인은 어느 곳에 있든지 일본 영사의 보호를 받으라.”는 포고를 내리게 했다.
미주 한인들은 이러한 일제의 책략에 반발했다. 하와이 ‘애와친목회’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명의로 일본 영사의 보호를 거부한다는 공동 결의문을 채택했다. 한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일본에 대한 미주 한인들의 분노는 항일, 배일 운동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지역별로, 단체별로 주도했던 항일 움직임은, 3.1 운동을 기점으로 더욱 확산되고 통합되기 시작했다
애국 동포 제군에게 근고함
일본이 한국을 합방하려고 한다는 소식이 1910년 2월부터 각 신문에 발표됐으나 국내에서는 일본의 경찰 감시로 인해 별 거부운동이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는 이에 즈음해 격분을 표하고 동포들에게 분발할 것을 공개 촉구했다.
“(중략) 애국 동포 제군이여 조국이 위란을 당하여 우리를 부르니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치자. 국가를 위하여 원수를 대항할 자 모두 오늘에 맹세하자 …… 애국 동포 제군이여 분발하고 모이라. 우리 전체가 미주에서는 북미지방총회로, 하와이에서는 하와이 지방총회로 모여서 운동방침을 정하고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우리의 한 몫을 바치기를 맹약하자.”
1910년 6월25일 대한인국민회 근고
항일 운동을 벌이는 미주 교민들
한일합방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이완용과 한국 강점의 ‘한일합방조약’을 맺고 그 다음날 외국에 통고하였으나 국내에는 일주일간 발표를 하지 않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0년 8월 29일 무장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정식으로 발표했다. 이 조약은 전문 8개조로 되어 있는데 한국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을 영원히 일본에게 양도할 것을 골자로 하고 한국의 황제 및 황족과 정부요인에게는 상당한 대우와 세비를 지급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로 인해 친일파 76명의 새로운 귀족이 생겨 작위를 받고 세비와 상금을 받게 되었다. 서울 남산에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헌병 경찰권을 통하여 무력통치를 시작했다.
애국 동맹단
1910년 7월 3일에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가 최정익을 단장으로 각 지방의 민중 대표자들이 샌프란시스코 총 회관 새크라멘토가 2928호에 모여 공동회의를 개최했다. 이들은 ‘애국동맹단’을 조직하고 9개조 결의안을 채택했다. 동포전체가 일치하여 행하기를 맹세한 결의안은 일본을 원수로 정하고 적대행동을 취하기로 맹약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만행을 한국과 상호조약을 체결한 9개국에 보내 조약상 의무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국내 동포들의 비참한 실정을 탐지하고 선전문을 만들어 구미 각지 언론기관에 발표하여 국제 여론을 일으키고 선전대회를 열어 동포의 애국정신을 고취하기로 했다.
군사 인재양성 사업을 미국에서 착수하기로 하고 한일합방 반대외교와 선전은 대한인국민회가 담당하고 군인 양성사업은 대동공진단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각 지방에 양성소를 설립하고 청년동포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병식 훈련을 받게 하고 경비는 동포들의 특별 연금으로 하기로 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선언되자 재미동포들은 비분에 빠졌다. 이에 집에 태극기를 달고 애국가를 부르며 한일합방을 부인하는 결의문을 세계에 발표하고 독립전쟁을 선포했다. 또 미주 동포들은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 황제에게 전보를 보내 동포들의 뜻을 전했다.
<대한제국 황제에게 보낸 전보문>
1910년 7월 3일에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가 최정익을 단장으로 각 지방의 민중 대표자들이 샌프란시스코 총 회관 새크라멘토가 2928호에 모여 공동회의를 개최했다. 이들은 ‘애국동맹단’을 조직하고 9개조 결의안을 채택했다. 동포전체가 일치하여 행하기를 맹세한 결의안은 일본을 원수로 정하고 적대행동을 취하기로 맹약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만행을 한국과 상호조약을 체결한 9개국에 보내 조약상 의무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국내 동포들의 비참한 실정을 탐지하고 선전문을 만들어 구미 각지 언론기관에 발표하여 국제 여론을 일으키고 선전대회를 열어 동포의 애국정신을 고취하기로 했다.
군사 인재양성 사업을 미국에서 착수하기로 하고 한일합방 반대외교와 선전은 대한인국민회가 담당하고 군인 양성사업은 대동공진단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각 지방에 양성소를 설립하고 청년동포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병식 훈련을 받게 하고 경비는 동포들의 특별 연금으로 하기로 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선언되자 재미동포들은 비분에 빠졌다. 이에 집에 태극기를 달고 애국가를 부르며 한일합방을 부인하는 결의문을 세계에 발표하고 독립전쟁을 선포했다. 또 미주 동포들은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 황제에게 전보를 보내 동포들의 뜻을 전했다.
<대한제국 황제에게 보낸 전보문>
“본회가 재미 동포 전체를 대표하여 간곡한 애국정신으로 이 글을 폐하게 올리오니 통촉하시옵소서. 지금 미령(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조국을 일본에 합방한다는 소식을 받고 마음이 아퍼서 간원하오니 폐하께서 합방을 끝까지 거절하시고 양보하지 마시기를 바라나이다. 이것이 물론 폐하의 판단에 있을 것이나 만일에 합방이 되면 조국이 망할 것과 무죄한 백성이 왜적의 노예가 되는 책임이 폐하에게로 돌아 갈 것입니다.
폐하 앞에 왜적의 위협과 역적 배의 간휼이 있을 것이나 2천만 신민이 폐하의 용단을 바라보고 있으니 치욕을 거절하시면 그 은택이 천추만대에 미칠 것입니다.
1910년(경술년) 7월 6일 재미한인 전체 대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 총회, 북미 지방총회”
<일본 황제에게 보낸 전보문>
“본회가 미령에 있는 한국 민족 전체를 대표하여 정의와 인도의 사명으로 간원하오니 우리의 강토를 일본에 합방하지 말으시고 한일 양국의 친선을 장려하시기 바라나이다. 일본이 국제공약으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는데 그 조약의 묵흔이 마르기도 전에 한국을 병탄하려는 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구제 도덕과 신용을 말살하고 세계 문명국 지위에서 타락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공리를 거슬려 합방을 강박 하면 이것이 두 민족 사이에 악화를 일으키어서 영원한 원수를 맺을 것이며 이로써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고 태서 민족이 없우이 여김을 받어 동양의 위험을 부를 것입니다. 합방정책을 변경하여 한일 친선을 실천하시면 폐하의 덕성이 천추에 미칠 것이오 만일에 합방을 강행하시면 우리는 폐하와 일본 신민을 적대시하여 영원한 원수가 될 것입니다.
1910년 (명치 43년) 7월 6일 재미 한인 전체 대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북미 지방총회”
항일투쟁 통고문
애국동맹단은 국내 통신에서 일본이 합방을 준비하고 7월15일에‘사내정의’를 ‘조선 통감’으로 임명해 불원간 합방한다는 소식에 접해 동포들에게 항일 투쟁 통고문을 내었다.
“(중략) 오늘 한족 된 자 누가 애통하지 않으며 분개하지 않으리오만은 애통하고 분개한 설화로 일을 치루지 못할 것이니 항일투쟁을택하는 것이 첩경인 곧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왜적을 대항하는 방도가 여러 가지 있으나 해외 동포는 각기 처지에서 가급적 성공할 자를 데 우리는 이미 결의한대로 외교 선전과 군인 양성을 급선무로 택하였다 …… 우리의 군사 운동은 국내 연락 관계로 보든지 왜적을 대항하는 방편으로 보든지 원동 방면에서 할 것인데 기구의 곤란이 없고 설계가 가능한 미령에서 한번에 몇십 명씩 혹은 몇백 명 씩 사관을 양성하여서 원동의 군대 편성을 협조하자는 것이다.
1910년 7월 9일 애국 동맹단 근계”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에 나타난 일본관련 기사
◈ 1907. 9. 27: 한인이 본 일인 단평 “일인의 성격은 박약잔폭하고 악독 간휼하니 도덕심과 박애심은 조금도 없고 탐욕이 대단하여 돈 한가지면 못 할 것이 없으니 부모라도 유산이 없으면 구박이 자심하여 노역을 시키며 …… 일본의 운명은 그 나라 제조품과 같이 견고치 못한 본질이 들어나 산산이 파락될 것이다.”
◈ 1907. 10. 4: “저 일본이 우리 대한민족과 강토를 다 저의 이른바 보호권 내에 꼬이어 잡아먹고도 부족하야 오늘날 이 해외에 머무는 우리들마저 저희 올가미에 씌우고자 하여 일본영사가 동포 김헌식씨를 심방하여 한인의 재산을 보호하려한다고 가칭하고 인명을 조사하여 적어 가려 하니 우리는 이 계교에 빠짐이 가하겠는가. 우리는 결단코 그러하지 아니한 줄로 아노라.”
◈ 1907년 일본의 해외한인 보호민화 책동의 일환으로 인명조사를 하려하자 이에 거부하며 뉴욕의 공제회는 동맹문을 결의하여 샌프란시스코 신한민보에 실었다.
“일본영사에게서 오는 자에게는 성명도 통하여 알게 하지 말며 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칭하고 간계 사행함을 거절하며 만일 동포 중에서 가만히 그 조사하는데 성명을 일러주다가 탄로될 대에는 우리는 저로 더불어 한 하늘 아래서 갓을 쓰지 아니할 사 ……”
◈ 1908. 4. 22: “일본에서 수입하는 술은 맛이 변치 않게 하는 독약을 많이 섞는 고로 위장에 극히 해롭다 하여 근일에 회관(국민회)에서 500여 통을 모아 일본으로 도로 보낼 것이다.”
◈ 1908. 6. 17: 일본인이 세탁소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미국인들은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에 모임을 조직하고 일본인을 견제하기 위해 요리사와 웨이터도 모임을 만들었다.
◈ 1909. 5. 26: “미국에 이는 일본인은 1906년 12월까지 총수가 5만3천1백인 가량인데 5분의 3이 캘리포니아에 종사하는데 그 중에 만 4천이 농사에 종사하고 경작지가 만2천 에이커다.”
◈ 1913. 8. 1: “8월 10일은 캘리포니아주에 외인토지 매매 금지법안을 시행하는 날인 고로 일인들은 그 전에 토지를 사고저하여 매득 한 것이 72만원이라더라.”
◈ 1916. 4. 27: “가주 일인의 통계 총 6만/로스앤젤레스 2만, 샌프란시스코 8천, 오클랜드 8천, 새크라멘토 부근 2만9천”
◈ 1916. 5. 18: “미국 이민국 발표에 작년 7월부터 올 3월말까지 9개월간 상항을 경유하여 입국한 이민총수 1만3천1백93명중에 일인이 4천1백93명인데 그 중에 2천1백13명이 여자로 9분(90%) 이상이 사진결혼한 여자로 대부분 부도덕한 방법으로 인연되어 왔다고 이민국에서 목하 조사 중이라 하더라.”
◈ 1916. 11. 9: “다수의 일인 상점이 결단하여 중국인 물화를 배척하였다”
◈ 1917. 3. 29: “상항 필모어 St.에서 일인소년이 백인 부인의 치마를 들추고 보다가 백인 순사에게 포박을 당하고 끌려갔다.”
◈ 1917. 9. 6: “고국으로 돌아가는 모씨는 패스폿을 내려하니 장정등록 적령자임으로 이민국에서 내주지 않고 일본영사에게서 서류를 얻어오라 하여 일본영사관에 가서 말하니 ‘우리는 재미 한인의 일을 간섭하지 아니 하노라’하여 워싱톤 정부에 직접 청원하였다.”
◈ 1917. 11. 1: “재미 일본인 회에서는 일 총독 스테분씨에게 중국인 노름관을 닫아 달라고 하였는데 가주 재류일인 6만 5천은 노름을 위하여 매년 2백만 원을 소모한다더라.”
◈ 1917. 11. 13: “일본인회 총 서기 가나가와란자는 새크라멘토 한인 리옥형씨의 이발소에 가서 당대 재류한인의 인구 조사할 것을 의논하고 얌치없는 비위를 부리다가 가진 망신을 당하여 얼굴이 새빨개져서 돌아갔다더라.”
◈ 1918. 4. 11: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신문에 실린 일본에 대한 통쾌한 논란-일본은 양의 가죽을 쓴 여우로 눈이 발개서 남의 토지를 침략하려고 애를 쓴다.”
◈ 1918. 4. 18: “4월15일부터 일본미 간장 된장까지 금지품 중에 들어 일인은 큰 공황에 빠졌다더라. 간장과 된장은 우리 사람의 조석으로 요구하는 물건이라 미리 조금씩 제조하여 준비하기를 바란다.”
◈ 1918. 5. 9: “당일로 간장 만드는 법: 일인 간장 안 먹기 위한 방도- 재미 한인의 식료품 중 간장 한 종은 오직 일인의 공급을 의뢰하는바 4월 15일 전시 수입금지령이 발표된 후 일인의 간장이 다시 미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지라 대개 간장은 우리 식료품 중에 한때라도 뺄 수 없는 물건인고로 이에 대한 구급책을 강구하는 동시에 이제 먼저 황보정걸씨의 실험 담을 게제 하여 일반 동포가정에게 보이노라.”
◈ 1918. 6. 6: “미련한 일인 은행장은 승강기에 즉사-서울 조선 은행장으로 있는 일본인은 미국에 유람 차 건너와서 샌프란시스코 팰리스 호텔에 들었더니 올라가는 승강기에 머리를 들어 밀었다가 곧 목이 끊어져 즉사하였다더라.”
◈ 1919. 7. 29: “한인이 일인에 보복-농장에서 왜놈들을 내몰아/캘리포니아 윌로우스 지방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한국에서 한인을 학대하고 살육하는 일을 생각하면 왜놈에게 물을 줄 수 없다고 하여 물꼬를 주지 않아 일인들이 할 수없이 그곳에서 떠나고 왜놈들의 경영하는 농장까지 한인들이 빼앗아 한다니 이와 같은 보복은 쉽지 아니하고 장쾌한 일이다.”
◈ 1919. 8.28: “샌프란시스코 헤이 St.에서 세탁업을 하는 왜적 한 놈은 백인 중에 배일 감정이 팽창하여 왜놈 세탁소를 가기를 원치 않는 이가 많은 고로 백인들이 와서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 ‘나는 한인이외다’하고 한인의 이름을 빌어 밥을 얻어먹는다더라.”
◈ 1919. 10.19: “일인이 요러케하여-맨티카의 사탕무우 농사를 지주가 물까지 공급하고 에이커에 9원 50전에 계약하는 것이 정례인데 지주에게 찾아가 10원 이상을 줄 테니 리즈를 달라고 하였다.”
◈ 1942. 4. 2: 3월1일 일인 단속령을 발표하여 무릇 일인은 적민 비적민을 물론하고 하오 8시부터 오전 6시까지 거리로 나 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만일 어기는 자는 5천 원 벌금, 1년 감금을 아울러 거행하기로 하였으니 한인이 이 시간에 거리로 나갈 때는 반드시 증명패를 차고 증명권을 휴대하기를 바란다.
<일본외무성문서-1909년 재미동포의 반일운동에 대한 보고>
미국 재류의 한인은 1인이라도 다소의 배일사상을 갖지 않은 자가 없으며 그들은 기회가 없으면 부득이하나 기회가 있는 한 말하는 것이 모두 배일사상의 발현이라 할 것이다. 즉 1인도 배일언동을 하지 않는 자가 없는 상태로 국민회는 실로 그들의 본거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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