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은 인물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이 초기 한인사회는 숱한 고난을 거치는 과정에서 뛰어난 지도자들을 많이 탄생시켰다. 이들은 암울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서며, 한편으로는 이민에게 계몽활동을 전개하여 무엇보다 한인들이 생활의 변화를 주장하며 개선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서재필은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였으며 7세에 서울에 올라와 14세 때 장원급제를 한 수재였다. 개화파 김옥균을 알게 되면서 개화사상을 갖게 된 그는, 일본 육군학교에 유학한 뒤 김옥균과 함께 사관학교를 설립하려다 수구파의 반대로 실패했다.
김옥균, 박영효 등과 1884년 갑신정변(개화당이 민 씨 일파의 사대당을 몰아내고 인민평등권을 주장)을 일으켜 신정부의 병조참판과 정령관을 맡았으나 청국의 군사개입으로 3일 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거기서 자신 때문에 부모와 부인은 음독자살을 하고 동생은 참형을 당했으며 유일한 혈육인 3살짜리 자식이 굶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일본정부가 망명객을 박해하자 그는 1884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망명한다.
“은둔의 나라에서 온 망명자들-반란 끝에 온 표류자-샌프란시스코는 세 진보당 지도자들의 피난처” 1885년 6월 19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신문은 그들에 망명에 이런 기사를 실었다. 그는 일당 2달러를 받고 하루 10마일을 걸어 다니며 가구상 광고전단을 붙이는 일을 했는데, 발바닥이 갈라지고 발목이 아파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일이 너무 고되고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혀 샌프란시스코에 펼쳐진 태평양에 빠져 죽으려는 생각도 가졌다고 한다. 그때 그 신문기사는 마침 그에게 도움을 줄 미국인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서재필은 영어를 배우려고 다녔던 샌프란시스코 메이슨 스트릿 장로교회의 성경 공부반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했다. 거기서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도움을 준 홀렌백을 만난다. 서재필을 선교사로 만들고 싶었던 홀렌백은 그를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게 한다. 워낙 머리가 좋아 1년을 월반한 그는 학교 백일장에서‘가필드 대통령에 대한 찬사’라는 제목으로 2등에 뽑혀 10달러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 3년 만에 우등졸업을 했는데 그즈음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명으로 바꾸고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시민이 됐다.
고학으로 1892년 컬럼비안 대학(현 조지 워싱턴대학) 학부를 졸업한 그는 메디컬스쿨에 진학해 한인 최초의 의사(의학박사)가 된다. 1894년 미국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했다. 그 후 갑신정변 주동자의 사면이 이루어지고 갑오경장 추진내각이 수립되자 조국의 개화에 봉사하려고 1895년 귀국했다. 1896년 4월 7일에는 한문을 모르는 민중을 위해 국문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 쓰기의 방법으로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1896년에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독립문을 세웠으며 만민공동회를 조직했다. 1898년 3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궐기대회인 ‘만민공동회’를 서울에서 개최해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했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와 이권에 개입된 러시아와 미국은 1898년 5월 14일 그를 미국으로 추방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미국에 개업했던 병원을 닫고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1919년 3월 15일 재미한인전체회의에서 외교고문이 된 그는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하고 각국에 한국독립을 위한 선전활동을 벌였다. 1919년 4월 한인자유대회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해 국제연맹과 미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3일간에 걸친 자유토론회를 개최하고 3일째 되는 날 독립기념관으로 시가행진을 주도했다. 미국 기마순경의 선도를 받으며 한인 150명은 때마침 쏟아지는 소나기에 흠뻑 젖은 채 태극기로 물결을 이루며 필라델피아거리를 메웠다.
그 때 이승만은 독립관에서 조선독립선언문을 목멘 소리로 낭독하여 워싱턴 주변에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구미위원회를 설치하자 서재필은 위원장을 맡고 1919년 5월 ‘한인 친우회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했다. 1만 명의 회원과 미국각지에 17개의 지부로 확대된 한인 친우회는 미국 상원의원들과 저명인사들을 가입시키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8월에는 ‘한국평론(Korea Review)’이라는 영문 월간지를 발행하고 주필로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21년 11월에 세계 군축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했으며 1922년 1월 미국 대통령 하딩을 직접 면담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1925년 7월 1일 태평양연안의 여러 민족이 서로 정치, 종교, 교육, 인종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범태평양회의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에서 개최되었다. 서재필은 한국대표로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이 회의에서 감동적인 연설과 활동으로 서재필은 대리 회장에 선출되는데 그 자리를 이용해 각국의 대표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호소한다.
3.1운동 후 자신의 병원과 문방구점 등 전 재산을 팔아 7만 6천 달러를 만들어 그것을 모두 독립운동에 쏟아 넣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은 파산지경에 이른 서재필은 2천 달러 빚을 얻어 1926년 의과대학원으로 복귀하여 의학연구에 몰두, 큰 업적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에 징병 의무관으로 4년간 봉사하여 미국국회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의사로 일하다가 1945년 8월15일 조국이 광복되자 일시 귀국하여 과도정부의 미군정 최고고문이자 특별의정관에 선임됐다. 1948년 9월 25일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이승만 측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는 국내 정계가 소란해지자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필라델피아 집으로 가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 들러 안창호의 장남 필립과 대한인국민회 간부들에게 고국소식을 전해 주었다.
필라델피아로 돌아간 그는 근교 작은 마을에 의료 실을 열고 주중 하루 3시간씩 환자를 돌보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조국의 불운을 통탄하다 1951년 1월 5일 86세를 일기로 필라델피아에서 생애를 마쳤다.
정부는 그에게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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