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은(1879-1981):신한민보를 50년간 보관

1879년 5월25일 개성 인삼상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첫 번째 이민 배에 올라 하와이에 왔다. 당시 배 삯과 식비 등을 합해 이민 오는데 드는 비용 100달러를 사탕수수밭 농장주가 미리 지불했는데, 일이 시작되면 매달 임금에서 제하여서 삼 년에 갚도록 했다. 양주은은 그 계약대로 삼 년간을 일한 후 1906년4월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대동보국회와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1940년 초 맹호군의 대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대동보국회 새크라멘토 지역 대리회장으로 활동했다. 1913년 흥사단 창설자 8명중의 한사람으로 흥사단 가입번호가 6번이다. 양주은은 1908년 스티븐스 저격사건의 산 증인이다. 그는 당시 샌프란시스코 페리 항으로 나갔던 사람이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동양인은 총을 살수가 없어 장인환은 같은 집에 사는 백인의 총을 갖고 나왔고 전명운의 총은 장난감 총이라는 것, 그러나 법원 기록에는 진짜 총으로 되어있다.

양주은은 사건당시 그 자리에 있던 자기가 재빠르지 못해 스티븐스가 쓰러졌을 때 땅에 떨어진 서류가방을 줍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일본영사관에서 챙기기 전에 만일 우리가 가졌더라면 그 안에 있었을, 한국과 관련한 비밀 자료를 입수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1920년까지 새크라멘토에서 농장주에게 수확의 10%를 받는 소작농으로 벼농사와 갖가지 작물을 재배했다. 1920년대 말 임시정부 수석 김구로부터 재정부족을 호소하는 편지를 받고 샌프란시스코 동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자금모집에 앞장섰다. 1941년 말 한인국방경위대로 맹호군을 창설하고 1942년 2월 정식 인준을 받아내었다. 맹호군의 상항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30가와 차이나타운근처에 ‘Uncle Sam’s Restaurant’이라는 식당을 내서 백인상대로 돈을 많이 모았다. 햄버거와 스테이크 등을 메뉴로 하였는데 요리사는 중국인이었고 종업원은 필리핀 한인 등 총 6명이었다. 1963년까지 40년간 한 식당을 경영했다. 그는 사진기를 구입해 독립유공자들과 사회단체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겼고 누구보다 먼저 1920년에 차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1913년 이대위목사 주례로 사진신부 이제현과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후에 대한여자애국단 단장을 지냈다.

양주은은 1909년 설립된 국민회 두 명의 설립자중 한 명이었으며 상항 한국인감리교회를 세운 초기 교인이다. 70년 이상을 그 교회에 다닌 평생 교인이었다. 이승만은 결혼 후 돈이 없어 3개월간 그의 집에 머물렀으며 김규식도 수개월간 그의 집에 머물렀다. 수백 명의 유학생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 주었으며 수천 불을 독립자금과 교회활동에 기부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서류와 1909년부터 모은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를 50년간 보관했다가 서울 국립도서관에 모두 기증하여(1961년) 미주이민사회를 연구하도록 했다. 1974년 국민훈장모란장을 본국정부로부터 받았다. 1997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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