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응호(1880-):흥사단 15번 도산의 정신으로 살다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난 윤응호는 일본군의 식량을 만주로 실어다 주는 일을 하면서 외국에 대한 견문이 넓어졌다. 1904년 24세의 나이로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왔다가 마침 황제의 명을 받고 이민 현지사정을 알아보려 왔던 윤치호를 만나 공부할 것을 권유받았다.

1906년 8월23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국민회와 흥사단에 가입하고 70여 년을 도산 안창호 정신으로 살았다. 윤응호의 단번은 15호로 덕, 체, 지의 삼육과 일종 이상의 기술을 가져야 살 수 있다는 도산의 뜻을 기려 자녀들도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그의 부인이 된 김도연은 간호학을 공부하고 있던 중, 미국에 가있던 친구의 중개로 윤응호의 사진을 받아 미국에 오게 됐다. 주로 새크라멘토 지역에서 벼농사를 종사하면서 농장 주인들에게 수확량의 10%를 받는 소작농을 했다. 풍년이 들면 큰 이익을 보았지만 그 외에는 겨우 먹고만 사는 생활이었다. 10년 넘게 벼농사 일에 매달린 후에는 딜라노 지역으로 가서 수박, 참외, 감자, 목화 등의 재배하는 일을 했다. 1936년부터 1965년까지 30년간 딜라노에 있었는데 한때는 채소 가게를 열기도 하였다.

스티븐스 저격사건 후 장인환 재판관 관련해 통역으로 이승만이 동부에서 왔다. 그러나 이승만이 자신은 기독교인으로 살인 재판의 통역을 맡을 수 없다고 하자 윤응호는 문양목과 함께 이승만을 공원으로 불러내어 설득한다. 그러나 결국은 주먹다짐까지 오가게 되어 그 뒤로는 이승만과 평생교류가 없이 지냈다. 부인 김도연은 1919년 대한여자애국단 창립 후 50년이 지나도록 대한여자애국단 월례회는 꼬박꼬박 참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윤응호는 남가주 초기 이민 제1호로도 불려진다. 50년간 윤응호 부부는 한인사회와 관련한 각 단체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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