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남 황산에서 출생하여 7세 때부터 17세까지 한문을 배우고 기독교감리교회에 입교하였다. 1903년 미주개발공사에서 모집하는 이민에 응모하여 하와이로 가서 1년 영어를 배우고 미주 본토로 왔다.
안창호와는 고향에서 면식이 있었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친숙한 사이가 되어 평생을 조국 광복과 교육에 바쳤다. 학교를 들어가려고 학비마련을 위해 아스파라거스, 합스 등을 재배하는 7개월 농장 일을 하고 백 달러를 벌었다. 그러나 안창호를 만나 그의 권고를 학업을 포기하고 미주한인지도에 나섰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와 더불어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공립신보의 주필이 되어 미주교민의 생활향상을 계몽하였다.
리버사이드에서는 거들떠보지 않는 한인들의 일감을 구하기 위해 지역 주민의 환심을 사려고 매일 길 청소를 했다.
어느 날 관심을 보인 미국인이 사정을 듣고 노동 주선소 차릴 돈을 빌려주어 리버사이드로 오는 한인들은 언제든 일을 하게 만들었다. 1907년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으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매국자를 숙청하는데 힘을 썼다.
안중근의사 이등박문 저격 후 변호사를 주선하고 자금을 모아 재판을 후원하였다. 중국 예배당에서 ‘한국현상과 교육형편’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남대문형무소에서 3년을 복역하였다. 다시 상해로 가서 7년간 항일 운동을 전개하고 1946년 환국하여 흥사단 심사부장이 되었다. 1948년 계명학교를 세우고 남산고등학교 교장을 겸임하였다.
1962년 정부로부터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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