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20세의 나이로 유학차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로스앤젤레스, 다뉴바,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60년을 오로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3.1운동이후 다뉴바에서 국민회 지방회장을 지내며 200여 한인들을 모아 대회를 열고 바로 그 자리에서 독립금을 거두었다. 혼자 서 한인이 사는 곳이면 찾아가서 독립금을 거두어서 이승만에게 보냈다. 포도장사 하던 것도 소홀히 하고 일 년 내내 한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싼타바바라, 임페리얼벨리, 로드아일랜드, 맨티카, 스탁톤 등으로 다녔다. 다뉴바에 사는 최학선이라는 사람은 400달러를 내고 다음에 벌어서 또 400달러를 내겠다고 약속을 하는 등 당시 한인들은 독립자금 내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노름을 하던 사람도 돈 통을 따로 두고 돈을 모았다가 이범영이 가면 내 주었다고 한다. 캘리포니아에서 자금이 걷히는 대로 워싱톤에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고 구미 외교선교위원회를 설치해 이승만에게 보냈다. 이승만의 최 측근으로 1954년 10월 진해에서 열린 아세아반공연맹 창설을 도왔다. 부인 이 메리가 당시 서울에 있던 남편에게 미국에서 뷰익차를 보냈는데 이범영은 그 차를 타고 다녀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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