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이승만은 천자문과 시를 가르칠 정도로 학식이 높았던 어머니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1894년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단발부터 결행하고 서구의 역사와 문화를 배웠다. 미국인 선교사 부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어 학비를 벌면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배재학당의 영어조교가 됐다.
당시 미국에서 돌아와 다니는 학교에 교사로 있던 서재필의 권유로 1894년 서울에서 ‘협성회’를 조직하여 회의와 토론, 민주주의 정신을 배운다. 그는 ‘협성회보’라는 주간신문을 만들어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비판을 했는데, 협성회보는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고 만다. 그 뒤에는 ‘매일신문’이라는 일간지를 발행하고 주필로 계속 활동했다. 1896년 6월을 기해 협성회가 정치단체인 독립협회로 발전하자 이승만도 독립협회 회원이 되어 정치무대에 나서게 됐다.
그 당시 독립협회는 서재필, 이상재, 남궁억이 주축이 되어 민권운동을 전개했는데 고종황제의 미움을 사자 독립협회는 해산상태에 처하게 된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되고 이상재와 남궁억은 체포됐는데, 그 때 이승만은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는 전단을 배포한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옥중에서 선교사들이 넣어 준 신약성경을 읽고 감화를 받아 동료죄수 40여 명을 개종시켰다. 투철한 믿음을 갖게 된 그에게 기독교는 그의 삶과 사상에 초석이 됐다.
그는 감옥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첫째, 세계와 마땅히 통하여야 할 줄로 안다. 둘째, 새 법으로써 각각 몸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을 삼아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 할 줄 알아야 한다. 넷째, 국권을 존중히 하자. 다섯째, 의리를 존중하라. 여섯째, 자유권을 중히 여길지라.”
감방에서 밀반출된 이 원고는 후일 박용만이 일본 세관원의 적발을 피해 트렁크 밑에 숨겨서 미국으로 들여왔다. 초판 천부가 한국인 망명객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판됐다.
1904년 노일전쟁이 발발하고 민영환 등 혁신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5년 7개월 만에 석방된 그는 선교사의 권유로 11월 미국으로 떠났다. 1904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10년까지 조지 워싱턴대학을 나오고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를 마쳤다. 1910년 6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한인으로는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후에 대통령이 된 윌슨 총장이 당시 직접 학위를 수여했는데 그는 이승만을 ‘한국의 자유를 회복할 인물’로 자주 소개할 만큼 이승만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1910년 9월 3일 귀국한 그는 서울 YMCA(Youngman’s Korean Association)에서 국제법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1912년 세계감리교회총회 한국 평신도대표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가서 총회에서 연설했다. 그때 그는 하와이에 있는 박용만에게 외교와 출판 사업을 하고 싶어 미국에 남고 싶다고 도움을 청했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기관지 ‘신한국보’ 주필이던 박용만은 1913년 2월 이승만을 하와이로 불러들였다.
하와이에서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승만은 1913년 9월 순 한글 월간지 ‘태평양잡지’를 발간하고 주필이 됐다. 1914년에는 하와이 한인들의 성금을 모아 24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여학생기숙사를 지었고 한인중학교를 설립해 교육 사업을 폈다. 그는 언론, 교육, 선교 등 세 방면에서 독립운동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하와이 국민회의 실권을 쥐게 된 그는 미주 본토에 있는 국민회 대의원회의 재정문제와 관련해 국민회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하와이 교회는 분열되기 시작했고 이승만은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한 뒤 1915년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총회를 장악했다.
그리고 아예 하와이총회를 대한인국민회에서 탈퇴시켰다. 박용만이 이끌던 독립군단의 군인 양성이나 이승만이 추구하던 사업이나 모두 재정은 미주한인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둘은 반목하게 됐다.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한인 대표로 민찬호, 정한경과 함께 가려던 이승만은 거기에 참석할 수 없는 여건이 되자, 한국을 위탁 통치하도록 바라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보냈다. 이에 한국의 주권 회복과 완전독립을 주장하던 독립 운동가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중국에 있던 신채호를 비롯한 54명이 위탁통치반대 성토문을 발표하며 분개했고, 3.1운동 소식은 분열되었던 한인단체들을 대한인국민회 산하에 단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또한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임명을 받은 그는 임시정부가 개조함에 따라 9월 6일 임시대통령이 됐다. 워싱턴에서 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한국자유의회의’를 개최해 미주 내 27개 단체의 대표들을 모아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선포했다. 그는 한국외교통신부를 설립하여 많은 홍보를 펼쳐 미 의회에 한국의 독립 원조 제안이 네 번이나 상정되게 했다. 그로 인해 미국 국회의사록에 한국 독립에 관한 기록이 남게 됐다.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했다.
1921년 7월 동지회를 조직하여 박용만을 무정부주의자로, 흥사단의 안창호를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자로 단정했다. 당시는 미주 각 단체가 한인들로부터 각기 독립운동기금을 걷기 시작하던 때여서 독립운동 자체가 분열양상을 띠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국민회가 걷는 애국금과 별도로 임정명의로 공채표를 4만6천400달러나 판매하였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여전히 재정난을 겪었다. 1922년 6월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의 불신임을 받았다. 1924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측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동지촌을 만들어 자급자족하는 부락을 만들려고 자본금 7만 달러로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했으나 실패했다. 1925년 3월 그는 임시대통령직에서 임시의정원 출석인원 4분의 3이 찬성해 탄핵 면직됐다.
“임시 대통령 이승만은 시세에 암매하여 정견이 없고 무소불위의 독재행동을 감행하였으며, 포용과 덕성이 결핍하여 민주주의 국가정부의 책임자격이 없고, 대한민국임시헌법에 기탄없이 저촉하였고 국정을 혼란시켜서 국법의 신성과 정부의 위신을 타락하게 하였음을 판정함”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1929년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지회를 결속해 나성동지회를 만들었다. 그 후 동지회와 국민회간의 돈 문제 대립으로 하와이 법정에까지 서게 되었던 이승만은 이때 패소하자 1931년 하와이를 떠나 국제연맹회의가 열리고 있는 제네바로 갔다.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한국 병탄과 만주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했다.
제네바에서 활동하는 동안 이승만은 1933년 여행 중에 오스트리아 여성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미국으로 데려왔다.
1934년 10월 8일 뉴욕시 몬클레아 호텔에서 결혼했다. 그가 서양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에 하와이 부인회 부녀들은 통곡을 했다. 이승만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보내느라 쌀을 걷고 떡을 빚어 백 근에 3달러씩 팔아 모은 돈을 워싱턴에 보냈던 것을 회상하며 그가 외국여자와 결혼한 것에 대해 민족적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1940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그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 육성방송으로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했다. 일본이 곧 패망한다는 육성방송으로 머지않아 독립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국내외 동포들에게 주었다. 이승만은 유럽에서 많은 외교활동을 하였는데 일본을 규탄하는 글을 여러 신문에 투고하고 임시정부의 승인과 한국의 국제연맹 가입도 요구했다.
1941년 4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미국정부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승인하게 하고 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 일원으로 참가시켜줄 것을 로비했다.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 창립총회 때 한국대표단을 이끌고 와서 연합국 여러 나라 대표단이 한국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국제질서 수립에 참여하도록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 다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자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귀국했다.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사나니 다 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광복을 맞아 조국으로 오고 싶어 하는 대한인국민회 관계자들을 못 들어오게 막기도 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73세에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0년 4월 19일 민주화운동으로 실각할 때까지 12년간을 한국의 통치권자로 있다가 실각했다. 하와이로 망명가서 살다가 1965년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1949년 그에게 건국헌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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