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이대위와 함께 미주 한인단체의 효시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한인사회의 생활개선운동을 펼쳤다. 1905년 일제가 한국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해외 유학생의 양성, 서적의 출간, 신문의 간행을 목적으로 캘리포니아주 패사디나에 대동교육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됐다.
1907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백일규, 문양목과 함께 대동교육회를 대동보국회로 개편하고 중앙총무가 된 그 해 7월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정미 7조약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한인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동년 11월에는 상해지방연회를 조직하고 청나라와의 관계를 다져놓기도 했다. 기관지 ‘대동공보’를 창간하여 민족정신과 국권회복운동을 주장했다.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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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삼을 파는 상인이었다. 그는 1903년 9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했다. 한인친목회는 미주 일대에서 최초로 결성된 한인 단체로, 환난상부(患難相扶)를 목적으로 한인 동포간의 연락과 친목을 도모하고 한인 사회의 생활 개선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자, 그는 그해 12월에 안정수, 방사겸 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패사디나에서 해외 유학생 양성, 서적 출간, 신문 간행을 목적으로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를 조직해 총무로 선임되었다. 그는 대동교육회를 이끌면서 한인들의 유학 주선과 미주 교포들의 계몽운동,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1907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백일규, 문양목 등과 함께 대동교육회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개편하고 중앙총무로 선임되었다. 대동보국회는 대한제국 황제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충성을 강조했으며, 재미 한인들의 국권 회복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유학 주선, 서적 출간, 신문 출간,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장경은 그 부당성을 주장하며 동포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1907년 9월 상하이로 건너간 장경은 그해 11월 대동보국회 상해지방연회(上海地方聯會)를 설치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30여 명의 학생들이 앞서 도착해 무관을 양성하고자 했지만 계획이 어긋나면서 대책없이 상하이에 머물고 있었다. 그 사정을 알게 된 장경은 대동보국회관을 만들어 학생들이 그곳에 머물게 했고, 대동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7년 10월 대동보국회의 기관지 <대동공보(大同公報)>를 창간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했으며, 미주 본토에 10개소, 하와이에 3개소, 국내에 22개소, 중국에 1개소의 신문 발매소를 두었다.
1909년 2월, 장경은 상하이에서 한문 잡지인 <태동신보(泰東新報)>를 발간했다. 그러나 그가 곧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단지 1호만 발간하는 데 그쳤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청나라 보황회 계열 중국 교민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대동보국회는 1910년 2월 국민회와 통합해 대한인 국민회로 개편되었고, 장경은 1911년 안창호, 안정근 등과 함께 북만주 밀산 기지 개척지를 돌아보기도 했다. 이후로는 상하이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인삼 장사에 종사하던 그는 1918년 1월 21일 싱가포르 여행 도중 숙환으로 사망했다.Source: 나무위키 장경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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