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호는 해산(海山)으로 황해도 재령 출신인 그는 1902년 안창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904년 공립협회를 창립하였다. 1905년 11월 기관지 공립신문을 창간하고 발행인이 됐다. 1907년 4월 신민회가 서울에서 창건되자 여기에 가입했다. 스티븐스의 망언에 항의를 간 한인대표 4명중 한사람이었다.
1909년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고 공립신문을 신한민보로 바꾸었다. 그해 4월 헤이그 밀사였던 이상설과 함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재로대한인국민회’를 도왔다. 1909년 10월 이등박문 처단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안중근을 지원했다. 1919년 3.1운동 직전 만주와 노령에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러시아에서 ‘독립부인회’의 조직을 적극 지원하였고 “한인사회당”군사부 위원으로 수청일대의 빨치산 고려인 부대 조직, 지도 사업에 마지막까지 분투하였다. 풍한서습으로 죽으면서 신체를 화장하여 달라고 유언하여 빨치산 일동은 정재관 동무를 통나무가지 불속에 장례하고 그곳을 정재관 골이라고 기념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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