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경(1891-1985):한인친우회를 조직

정한경은 어린 나이에 박용만의 삼촌이 되는 박장현이 고향에다 세운 대학교에 다니면서 신학문에 눈을 떴다. 1904년 14살의 나이로 새 학문을 배워보고 싶어 하와이로 왔다가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왔다.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내려 한인교회에서 접시 닦기와 음식을 만드는 일을 1년간 하였다. 처음 도산이 정한경을 만났을 때 “정군은 보통사람이 아니니까 남의 밑에서 일하지 말고 미국신문에 논설을 쓸 수 있는 정도는 되라”며 25전을 주며 격려했다는 일화가 있다.

네브라스카 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공부하고 박용만을 만났는데 한인사회에 참여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됐다. 소년병학교를 세우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18년 독일이 항복하여 세계 제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미주 각지에서 모인 재미 한인전체회의가 열리고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이승만, 민찬호와 함께 그도 선출됐다. 그러나 미 국무성이 ‘한국은 나라가 없으므로 참석할 자격을 가질 수 없다’고 하여 프랑스행은 좌절되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으나 그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구미위원회 유럽대표로 파리에 체류하도록 하였다. 워싱턴에서 이승만 박사, 홍언, 현순목사, 정한경 박사 등이 상해임시정부와 국민회의 구미위원회 위원으로 대미외교를 담당하였다. 정한경은 태평양연안 및 뉴욕거주 교민들을 중심으로 파견된 김규식과 함께 ‘신고려회’를 조직하고 외교활동을 벌였다.

1919년 2월25일 이승만과 함께 윌슨 미대통령을 비롯한 강화회의 각국대표들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노스 웨스턴 대학에서 경제를 공부하고 1921년 워싱턴 D.C.에 아메리칸 대학에서 이승만 박사 다음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구미위원회 사무총장, 파리 약소민족회의 국가대표, 워싱턴 군축회의 상해임시정부 대표서기, 초대 주일대사를 지냈다. 그는 영문으로 된 4권의 책을 저술한 학자였다. ‘Korean Treaties’(한국이 다른 나라와 맺은 조약들을 모아놓은 책), ‘The Oriental Policy of The U.S.A’(일제의 한국지배 선전이 미국에 준 영향에 대한 책), ‘The Case of Korea’(한국 실정을 다룬 책), ‘The Russians Came to Korea’를 저술한 학자로 해박한 지식과 두뇌를 미국과 미국사회를 움직여 독립 쟁취에 노력을 기울였다. ‘북미합중국의 동양정책’과 ‘평화회의’등의 글을 저술하여 한국 독립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한국사정’을 영문으로 발행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지적하였다. 1919년 10월 1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인 1천여 명의 동의를 얻어 한인친우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을 지지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임시정부 구미위원회 위원으로 대미외교를 담당하였다. 그는 유일하게 도산 안창호, 우남 이승만, 박용만을 만나고 그들의 사상과 뜻을 펴 나갔다. 그러나 정한경박사는 평생동안 국민회, 흥사단, 동지회 등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을 했다. 그는 한국은 약소국이므로 강대국인 미국을 움직여야만 대한의 독립은 가능하다는 외교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로부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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