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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미국에 온 그는 일생을 선교 사업에 바쳤다. 1908년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한인의 실업을 장려하였다. 1909년 5월 멕시코에 이주한 동포들이 농장의 노예노동에서 풀려나는 때에 북미국민회 총회에서는 황사용과 방화 중 두 위원을 멕시코로 보내 실정을 알아보고 돕게 하였다. 5월 20일경 유카탄주의 프로그레소항에 도착하였는데 그것은 한인노동자들이 발을 들여놓은 이래 처음 가는 한인이었다. 처절한 노예의 삶 속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피맺힌 신음을 하던 그때 그들이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었다.

구름 떼처럼 모여든 그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얼굴은 시커멓게 갈라지고 손바닥은 갈기갈기 갈라지고 다리는 가시에 찔려 상처투성이였다. 도착한 그들은 1909년 5월 9일, 멕시코 노동계약 만료일 3일을 앞두고 조국도 버린 노예의 삶을 살던 그들을 위해 감격스러운 유카탄주 메리다지방에 국민회를 설립하였다. 대다수의 사람이 농장에 묶여있어 참석 못하고 16개 농장에서 대표 70여명이 참석하였고 창립회원은 305명에 달했다. 이 숫자는 멕시코이민자의 3분의1 정도로 가장과 호주들의 숫자였다. 그는 또한 원동특파원이 되어 2년 동안의 노력으로 러시아령에 16개 처소와 만주지방 8개 처에 지방회가 조직되고 시베리아 지방총회와 만주지방총회가 설립되었다. 1909년 12월18일에는 샌프란시스코 북미지방총회장 되었다.
1916년 10월26일 산호제에서 목사가 되어 북가주 한인 남미이민교회의 지방목사가 되었다. 1917년 9월6일 성경전문과를 연구하기 위하여 달라스텍사스 에스엠 대학에서 4년간 공부를 했다. 미주한인 선교를 위해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일생을 선교에 바치고 초기 이민의 생활개선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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