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권(1875-1960):도산 정신을 이어간 문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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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9세의 나이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왔다. 천성적으로 노동이 맞지 않아 고생하자 이를 본 친구 강영소가 하와이 애와농장에 조그만 점포를 하나 내주었다. 농기구와 음식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러나 외상값을 회수하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지만 1908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와서는 미국인 가게에 점원으로 일하면서 돈을 모아, 고향 경주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동생 둘을 불러 들였다. 초기 이민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1913년 12월5일 38세 때 29세의 김혜원을 하와이에서 데리고 와서 이대위목사의 주례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결혼했다. 농장일과 점원 일을 하며 흥사단 사업에 깊이 참여했다. 롬폭 농장에서 일을 하다 비로 인해 농토가 다 떠내려가자 포도밭이 많은 다뉴바로 이사했다. 부인과 함께 포도 따는 일을 하였다.

3.1운동 후 1919년 8월5일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이 조직되었다. 당시 34세였던 부인 김혜원이 초대 총 부단장으로 여성운동에 앞장서자 이 일에 적극 협조해주었다.

김성권은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한학을 공부한 전형적 선비요 문필가였다. 그는 미국에 와서 흥사단에 들어 도산 정신을 구체화해 나가며 글로 한인사회에 희망을 주었다.

흥사단 연차대회에 참석한 김성권(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과 부인 강혜원(여섯번째) 그 옆은 이혜련과 맏딸 수산 안. Source: 대한인국민회

정부에서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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