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1889-1967):주미 외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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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에서 출생해 양정학교와 보성중학에서 신학문을 익히고 계몽운동단체인 자강회 회원이 됐다. 유학으로 1909년 4월에 미국으로 와서 박용만의 군사학교인 헤이스팅 소년병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8년 오하이오 콜럼버스 대학에서 정치와 철학을 공부하고 문학사학위를 받았다.

1919년 1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임명을 받고 신한민보 주필로 일했다. 콜럼버스대학 시절에는 학생회에서 발행한 ‘소년한국(Young Korea)’ 을 책임졌다. 이 책은 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격려하는 내용이었다. 1920년 샌프란시스코 학생대표로 학생총회 발기자회에 참석했고 박용만이 결성한 대조선 독립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군사통일회의 운동자금을 조달하는데 앞장섰다.

1927년 4월 구미위원부의 임명을 받고 1929년까지 대미 외교 사무에 일했다. 1929년 11월 하와이에 대한인교민단 일을 보며 국민보 주필을 겸했다. 1941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대표로 해외 한족대회에 참가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고 국방위원장이 됐다. 1944년 주미외교위원부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3만’으로 알려진 ‘우남 이승만’ ‘우성 박용만’ ‘검은 정순만’의 전기를 저술해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기여했다. 정부에서 195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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