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양목(1869-1940):동학혁명 참가 후 미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Read in English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으로 가담

문양목(1869.6.7 ~ 1940.12.25)은 충청남도 서산 출신으로, 일찍이 반봉건·반외세의 의식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25세의 나이에 농민군에 가담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하자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며,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1903년 인천에서 서당 교사로 활동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그는, 점차 노골화되는 일본의 한국 침탈에 분노하며 국권 회복을 위한 더 적극적인 길을 모색했다.

1905년, 그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위장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 1년 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그는 초기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자리 잡으며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07년 3월, 장경, 백일규 등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10월에는 중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기관지인 대동공보사 사장 겸 발행인을 맡아 국내외 동포들에게 독립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스티븐스 항의 방문과 장인환·전명운 의거 후원

1908년 3월, 대한제국의 친일 외교 고문이었던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망언을 쏟아냈다. 이에 대동보국회는 미주 한인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공동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한인 대표 4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문양목은 스티븐스를 직접 찾아가 발언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그는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Fairmont Hotel) 로비에서 스티븐스를 구타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이튿날인 1908년 3월 23일, 전명운과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양목은 즉시 장인환·전명운 의거 후원회를 결성하고, 재판 비용 마련과 변호사 교섭을 담당했다. 그는 이 재판을 단순한 개인 사건이 아니라 ‘독립재판’으로 규정하고, 이를 통해 미국 사회와 세계 각국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와 일본의 침략 만행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독립정신과 국민개병설 출판

1908년 7월, 박용만이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한인 군사학교 설립과 재미 한인 단체 통합 논의를 목적으로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를 적극 후원했다. 이후 1909년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자, 학생들을 권유하여 입교시키는 등 사관 양성을 통한 항일 무장 투쟁을 지지했다.

1910년,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동신서관이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서적을 출판하는 데 힘을 쏟았다. 같은 해 2월, 이승만의 『독립정신』과 박용만의 『국민개병설』 등을 출판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1년 2월, 그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었으며, 군인 양성 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또한, 시베리아와 만주 지역에 대한인국민회 지방 총회를 설립하는 등 해외 독립운동 거점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1912년에는 신한민보 주필로 선임되어 박용만의 『군인수지』를 발간하는 등 항일 투쟁을 위한 서적 출판을 지속하며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했다.

이후 1919년 파리평화회의가 열리자, 그는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힘썼다.

문양목은 조국이 독립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1940년 12월 25일 7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장남 **핸리 문(Henry Moon)**은 미국 버클리대학 의과대학 병리학과장으로서 한인 2세의 위상을 높이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인정받아,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04년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또한, 최재학 씨가 2005년 그의 생애를 조명한 책 『독립운동가 우운 문양목 선생의 생애』를 출간하며 그의 공헌을 널리 알렸다.


Comments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