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백일규는 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이민을 와 1905년 5월에 하와이로 들어와 이듬해 8월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1907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보국회 설립 시 발기인이었으며 1908년 3월 발생한 스티븐스 사건에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 후원회 회장을 맡았었다. 1909년 7월에는 네브라스카에서 박용만과 함께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였다. 1918년 가주 대학에서 경제과를 마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대동공보 주필이었던 그는 1918년 8월에 북미 대한인국민회의 신한민보 주필로 임명된 이래 16년 동안 신문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당선되어 미주 본토, 하와이 멕시코에 있는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총 지휘했다. 1920년 2월 ‘한국경제사’를 출판하였으며 1926년 2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8년간 봉사했다.
1934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 제3행서 재무위원으로 군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1943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기관지 ‘독립’의 사장 겸 총무로 활동했다. 해방 후 1946년에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국민보’주필로 2년간 활동했다. 로스앤젤레스 공원묘지에 있던 유해는 2002년 9월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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