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준(1865-1907):흥사단

평북 의주 태생으로 그에 대한 공적은 당시 홍언의 남긴 글로 잘 알 수 있다.

“동년 四月 十八日에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폭발하여 상항(샌프란시스코)지부가 화염에 들어갈 때에 공립회관을 또한 불속에 묻고 겨우 문부 존안을 구하여 창황히 오클랜드로 건너가서 임시 사무소를 설치하고 속사판에 조난한 정형을 인쇄하여 각처에 소식을 통하니 하와이 오아후 에와 친목회에서 글을 보내어 위문하는 동정을 표하였더라. 공립협회는 이 같은 큰 재난을 만난 후에 회무 발전을 쉬지 아니하고 동년 七월에 다시 석판신문을 간행하더니 동년 八월에 광무 황제 폐하께서 재미한인의 조난을 민휼하셔 휼금을 하사하시니 이는 재외 한국 여민이 처음으로 내국 정부의 보호를 받던 때라. 一치한 정성으로 성은을 느끼며 휼금의 여액을 공립협회에 부쳐 다시 공립관을 건설하니라. 공립관이 다시 의연히 오클랜드에 건설된 후에 내지 각 사회에 교섭을 통해 내지 자강회 총간부에서 글을 보내어 서로 제휴하기를 요구하니 이는 해외 한인단체가 내지 정당으로 더불어 성세를 연락하던 처음이라. 일반 동포가 더욱 힘을 아울러 공립협회의 위망을 높이며 광무 十一년 四월에 비로소 공립신문에 활자를 사용하니 동포의 열정이 진실로 극도에 달하였으며 당시 주무자의 힘이 또한 피곤하여 총회장 송석준 씨가 병석에 누워 회무와 출판기관을 총할 주선하다가 마침내 오클랜드 공립회관이 다시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옮기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무 十一년 五월 十七일에 세상을 떠나 로스앤젤레스 공립매장지에 유해를 묻으니 해외 한인단체에서 몸을 바쳐 간력을 다하다가 인하여 그 몸을 희생한 사람은 오직 송석준이라 송씨는 원래 대영웅, 대호걸이 아니로되 동포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며 단체를 위하여 충성을 다함이 가히 공경할 인물이오. 병든 베개에 누워 붓대를 잡고 국궁진체하던 형용이 모든 사람의 참통한 마음을 주어 당시 사람이 위하여 애감한 눈물을 뿌리더라. 때는 공립회관이 다시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옮겨 들어와서 모든 회무가 차차 정돈이 되더니 중도에 돌연히 총회장의 재상을 당하여 정부회원의 애통함이 다만 옛일을 느끼며 전도 진행이 자못 막연하더니 부회장 정재관 씨가 총회사무를 대관하여 一체 회무가 의연히 정돈이 되며 모든 규모의 극비함이 찬연하여 가히 볼 만하더라. 이후로 공립신보는 점점 확장하여 내지와 원동 각처에 三四千장 신문을 발행하니 융회 원년 九월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동포들이 비로소 글을 보내어 통신을 연락하고 익년 二월에 내지 부인사회에서 공립신보를 찬성하기 위하여 내지 각처에 추지서를 돌려 의연을 청하며 매일신보사에 수전사무소를 설치하니 이는 해외 한인단체가 처음으로 내지 각 사회에 신앙을 펴던 때이라. 융희 원년, 곧 기원 四千二百四十년 十월에 상항(샌프란시스코)에 재류한 유지인사들이 대동보 보국회를 조직하고 남방 각처에 지회를 설립하며……”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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