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서의 후원,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면서 미 언론 등에 일본의 침략야욕과 한국의 독립 필연성을 인식시켰다.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흥사단 발기대회에서 8도 대표 중 한 명으로 동 단체의 재무와 이사부장직을 역임했다. 또 도산이 공적활동을 하는 중 그 가족의 생계를 유지시키는데 애썼다. 도산에게 가장 힘이 됐던 사람 중 한 명이다.
1919년 대한인국민회 독립운동자금 재무로 임시정부 건설의 경비를 조달했다. 1917년 안창호와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조직하고 주식금 9만5천 달러를 모집하여 쌀농사 이익으로 군자금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7년 문을 닫고 만다.
1919년 대한인국민회 재무로 독립운동자금과 임시정부 경비조달에 힘썼고 건축위원으로 1938년 총 회관을 낙성하는데 헌신했다. 1941년 미주 내 모든 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조직에 집행부위원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했다. 1944년 주미외교위원부의 외교위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재미한족 국내파견단의 재무가 되어 40년 만에 조국 땅을 밟게 된다. 1956년 신병으로 별세했다. 자손들이 기념사업으로 그의 호를 따서 우강장학재단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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