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남 평양에서 출생하여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목적으로 1903년 미국으로 왔다.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와 더불어 친목회를 조직하고 한인사회의 생활개선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와 미주 최초의 민족운동기관으로 항일운동과 동족사랑을 목적으로 설립한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06년 12월6일에는 상항한인감리교회를 창립하여 동포들의 구호사업과 교육 계몽운동, 직업알선 등의 일을 수행했다.
1908년에는 오레곤 주의 포틀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16년 UC 버클리를 한인 최초로 졸업하고 태평양 신학교도 나왔다. 같은 해 상항 한인 감리교회 내에서 미국 내 한국어 출판의 효시인 ‘대도’라는 주보를 발행하여 매부 본국과 세계의 정세를 전달하는 한편 기독교 복음전도 및 교포교양에 공헌했다. 1906년 지진으로 폐허가 된 샌프란시스코에 양주삼전도사를 초빙해 구호사업 교육계몽 건강관리를 갓 문을 연 교회를 통해서 수행했다. 후임 윤병구 전도사가 목회를 하고 UC 버클리 재학 중이던 이대위 목사는 1911년8월 3대 담임으로 취임했다. 이 교회는 예배 친교 봉사 외에 애국운동의 본산지가 되었다.
1909년 2월 대한인국민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버클리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한일합방이 되자 그해 7월 애국동맹단을 조직하고 일본 왕에게 합방을 강력히 반대하는 서신을 보냈다. 국권회복을 위해 각 지방에 독립군 양성소를 설립하고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려 애썼다. 미국으로 망명해 오는 애국지사와 신도 유학생들을 위해 신원 보증을 서거나 이민국 수속을 위해 대변인을 자처하며 헌신했다. 1911년 상항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1913, 1915, 1918년 세 차례에 걸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이 되고 6월에는 신한민보 주필이 되었다.
캘리포니아주 해밑에서 한인노동자들이 동양인 배척으로 쫓겨난 사건이 생기자 주미일본공사가 해외한인들의 노동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뛰어들자 미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이 한인사회에 간섭행위를 못하도록 요청해 허락을 받아내었다. 1914년 4월 대한인국민회는 사단법인으로 정식 인정을 받아 망명자치정부의 역할을 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당시 입국한 유학생들의 이민국 입국서류를 보면 모두 샌프란시스코 1053 Oak St에 David Lee (이대위 목사)의 주소로 간다고 되어있다. 유학생들은 지참금($100)을 보여주어야 했고 한 달에 $50의 재정지원이 보증되어야 했다. 이런 일로 도움을 청하는 유학생을 이 목사가 다 거두어 주었다. 또 질병으로 인해 입국심사에 걸린 사람에게는 50달러와 편지를 보내, 병원치료를 받게 하고 그 뒤 입국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1915년 3월에는 국문자모를 몸소 만들고 독창적인 ‘인터타입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신문에 활자의 혁명을 일으켰다. 이 식자기는 1915년-1970년까지의 신한민보를 제작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 회장직을 맡고 있던 그는 대한독립선언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1921년 김규식, 송헌주와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외교와 독립선전활동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1910년부터 1920년대까지 샌프란시스코 초창기 사회에서 이대위목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고 그는 자신의 50평생의 절반을 재미동포와 함께 했다. 그는 또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의 통역을 맡아하면서 국민회총회장으로 사진결혼으로 여권도 없이 오는 신부들의 신원보증인과 이민 수속의 대변인이 되었고 결혼식 주례는 도맡아 했다. 그 시대 샌프란시스코에 유학한 학생 수는 500여명이고 70여명이 사진결혼신부들이었다.
이대위 목사는 성격이 강인하고 결심하면 늘 실행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상항 한국인감리교회 송정률 목사는 교포사회나 겨레의 장래를 위해 가장 실질적으로 몸으로 직접 봉사한 사람으로 도산 안창호만큼 훌륭하다고 했다. 이 목사는 17년간 목회 하던 교회의 새 건물이 세워지기 2년 전 1928년 6월 17일 과로로 인한 폐병으로 49세에 별세했다. 1928년 6월 22일 사이프러스 묘지에 그의 시신이 묻힐 때 전 미주 동포는 물론 멕시코, 하와이 한인까지 깊이 슬퍼했다. 2005년 국립묘지에 천정되었다.
1995년 정부에서는 건국헌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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