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호(1893-1994):미주 공군부대 창설에 기여

평양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한장호는 일생을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다가 샌프란시스코 근교 밀벨리에서 100세에 사망하였다. 19세에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할아버지가 챙겨주는 돈과 옷을 가지고 한 밤중에 부모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도망을 하였는데 다시는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 1913년 상해로 가서 민족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미국으로 오기 위한 여비 마련을 위해 2년을 그곳에서 일했다. 1916년 샌프란시스코 앤젤 아일랜드에 도착하여 상항한인감리교회 이대위목사의 도움으로 이민수속을 밟았다. 1916년에 3월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 회장을 역임했다.

북가주 맨티카로 이주하여 농장인부로 일하던 중 같은 농장에서 함께 일하던 이삼성, 오박만, 성복수등과 더불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계획을 수립했다. 1919년에는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시에 비행기 학교에서 교습을 받고 비행사가 됐다. 그 후 한국최초의 한국독립군공군부대(Korea Independent Air Force)를 창설하는데 기여하였다. 비행조정법 등 구체적인 기술교육과 비행훈련을 받고 전투에 필요한 전폭기를 구입하기 위해 미국정부와 기관 등에 재정적 후원을 요청하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1920년 2월 윌로우스에 노백린이 한인비행학교를 세우고 김종림이 비행기 5대를 구입하자 이곳에 교관으로 임관했다. 50여명의 학생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면서 항일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한장호의 생각은 비행편대를 구성하여 도쿄로 폭탄을 싣고 날아가 폭격함을 대한민국 독립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1942년에 미국의 두리틀 장군이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승인 받았던 방법으로 미국의 비행단이 도쿄를 습격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려고 했던 계획과 같다. 이런 비슷한 계획을 한장호는 1919년에 이미 구상하고 있었다.

1921년 6월에는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에 있는 박용만의 소년병학교에 참여했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아들 Dr. Richard는 아버지 한장호가 박용만의 군사학교에 동참하고 있을 때 네브라스카의 헤이스팅스에서 태어났다. 시카고의 노스웨스턴 의대를 나온 그는 스탠포드대학에 있었으며 의학 관련 essay를 써서 여러 번 상을 받았다. 1949년 심장병수술에 신기술을 발견한 선구자로 의학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부인은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던 ‘토담(Clay Walls)’을 쓴 김난영이다. 심장전문의 의학박사로 미 주류 사회에 널리 알려진 그는 이제는 은퇴하여 현재 가족사 관련 글을 집필 중에 있다. 아버지의 소장품은 USC 의 Korean Heritage Library에 기증되어 현재의 가족들의 이름으로 5개의 콜렉션을 가지고 있다. 헬멧 등 아버지가 사용했던 비행장비는 샌프란시스코의 Historical Society(on Mission)에 기증했다.

정부에서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코멘트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