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수부’라는 필명을 가지고 있던 홍언은 서울에서 출생했다. 문예에 소질이 있던 선비로 공부를 목적으로 1905년 하와이로 이민 왔다. 1906년 하와이에서 ‘자강회 월보’와 1907년 하와이 24개 단체를 합쳐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한인합성신보의 주필이 되었다. 또한 ‘신한국보’주필이 되어 동포들의 실력향상과 교육 장려를 위해 노력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와서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으로 봉사했으며 1908년부터 4년 동안 신한민보 주필로 일했다. 신한민보에 동해수부라는 필명으로 시가와 글을 계속 기고하여 미주한인들에게 정신적인 위로를 주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913년 창립된 흥사단의 8도 대표 중 경기도 위원이었다.
화교들을 상대로 모금활동을 하여 국민회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20년 6월 구미위원부 화교위원이 되어 중남미 화교들을 방문하여 기금을 모았다. 1922년 6월 샌프란시스코로 귀환하여 국민회 순행위원으로 캘리포니아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원조를 청했다. 1924년에는 김현구, 최진하와 함께 ‘이문회’라는 문예창작그룹을 조직하여 문학 활동을 펼쳤다. 조국의 국권회복과 민족교육, 문맹퇴치운동, 애국사상고취를 위해 노력했다. 별세하기 전까지 십 수 년 간 신한민보 주필로 봉사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홍 언 |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홍언은 필명이 동해수부(東海水夫)이다. 신한민보와 대도(大道)에 수많은 글을 발표한 문장가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평생을 국민회 맨으로 살았다. 별명이 미스터 국민회였다. 미주 초기이민역사 연구가인 방선주 박사는 홍언을 다
음과 같이 평가했다. 첫째 미주에서 40년간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독립의식 고취에 힘썼다. 둘째 평생을 국민회를 위해서 살았다. 셋째 역사가였다. 미주 한인역사에 가장 정통한 인물이었다. 넷째 문인이다. 그가 남긴 시만도 5백편이 넘는다. 다섯째 김삿갓이다. 미주와 캐나다, 멕시코, 페루, 칠레등을 두루 다녔다. 여섯째 북미한인과 북미화교의 교량역이었다. 중국인 신문에 글을 싣고, 화교를 방문하며 모금을 했다. 일곱째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홍언은 흥사단 단우 7번이다. 1913년 5월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단할 때 경기도 대표로 참여했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핵심간부로 이대위, 백일규와 함께 신한민보를 이끄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51년 71세로 로스앤젤리스에서 별세했다.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7년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음과 같이 평가했다. 첫째 미주에서 40년간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독립의식 고취에 힘썼다. 둘째 평생을 국민회를 위해서 살았다. 셋째 역사가였다. 미주 한인역사에 가장 정통한 인물이었다. 넷째 문인이다. 그가 남긴 시만도 5백편이 넘는다. 다섯째 김삿갓이다. 미주와 캐나다, 멕시코, 페루, 칠레등을 두루 다녔다. 여섯째 북미한인과 북미화교의 교량역이었다. 중국인 신문에 글을 싣고, 화교를 방문하며 모금을 했다. 일곱째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홍언은 흥사단 단우 7번이다. 1913년 5월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단할 때 경기도 대표로 참여했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핵심간부로 이대위, 백일규와 함께 신한민보를 이끄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51년 71세로 로스앤젤리스에서 별세했다.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7년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