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10월18일 평북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형 황사용 목사의 집에 살면서 일찍 기독교영향을 받았다. 성실학교와 성실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을 받고 선생을 하면서 애국모임인 신민회에서 활동했다. 일본경찰에서 잡으려 하자 중국 사람으로 변장을 하고 상하이를 통해 1913년 4월21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미국정부로부터 비공식 승인을 받은 대한인국민회(KNA)대표인 이대위목사의 보증으로, 여권 없이 미국에 왔으나 입국이 가능했다. 원래 업랜드라는 곳에 가서 한인사회를 위해 일하기로 하였으나 돈이 없어 북가주 스탁톤에 토마토 농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갖은 고생 뒤에 형의 도움으로 샌프란시스코 Mason St.에 양복점과 세탁소를 겸한 가게를 열었다.
1915년에 전도사가 되고 1920년 목사 안수를 받아 상항 한국인감리교회에서 1920-1928년에는 부목사로, 1928-1942년까지 14년간은 담임목사로 재직했다. 교회는 1930년 한인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1123 Powell St. 자체 건물을 마련했다. 대한인국민회 회장과 흥사단 단장으로 있었다. 목사로 재직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유학생과 정치 망명객에게 도움을 주고 직장을 알선했다. 수십 년에 걸친 교회 봉사, 은퇴 후에도 매일 통일을 위해 기도는 미주 한인 사회에 큰 힘이었다.
흥사단 회원 단우 번호가 9번인 황사선 목사는 1924년 사망한 첫 번째 부인에게서 2남 1녀, 폴과 엘리자벳과 메리를 얻었고 1932년 재혼한 부인은 자녀 없이 사망했다. 세 번째 부인은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른 애국여성 황옥석이다. 그 사이에 딸 프란시스를 얻었다. 황 목사의 집은 늘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황 목사는 생활을 위하여 옷도 만들고 수선도 하며 세탁도 하는 세탁소를 운영하였으며, 은퇴 후에도 그 일을 계속하며 어려운 한인들을 도왔다.
황사선의 아들 폴은 황 목사가 1913년 미국에 온지 4개월 만에 출생했으며 샌프란시스코 주립 대를 졸업하고 1943년에는 해군에 들어가서 2년 동안 의료진으로 일을 했다. 흥사단에서 활동했던 신대윤의 딸 루스 신과 1943년 결혼하였다. 폴은 흥사단 단우 1번이었던 하상옥의 아들 그리고 최봉윤과도 오랜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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