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가 된 금문(金門), 그 위에서 다시 세운 한인의 자존심

1. 전설의 도시가 무너진 아침: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12분

1848년 금광 발견 이후 ‘골드러시’를 타고 급격히 팽창한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서부의 심장이자, 태평양을 건너온 한인들에게는 ‘본토의 관문’이었습니다. 안개가 아름답게 내려앉던 1906년 4월 18일 새벽 5시 12분, 도시의 평화는 단 수초 만에 끝이 났습니다.

역사적 통계

규모: 리히터 규모 7.9~8.3 (추정)

지속 시간: 약 45초~1분간의 강력한 진동

피해 범위: 시가지의 80% 파괴, 4.7평방마일(약 1,200헥타르) 소실

인명 피해: 공식 기록 700여 명(현대 사학계는 3,000명 이상으로 추정)


목조 건물이 밀집했던 도시는 파괴된 가스관에서 시작된 거대한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수도 본관까지 터져 불길을 잡을 방법이 없었던 3일간의 화재는 ‘금문(Golden Gate)’이라 불리던 화려한 도시를 지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Source: F.A. Webster, “View album San Francisco Earthquake and Fire Ruins”


2. 한인 커뮤니티의 비극: 파월 가(Powell St.) 1038번지의 비명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거쳐 본토로 들어온 한인들이 뿌리를 내리던 초기 정착지였습니다. 본토 한인 사회의 중추였던 공립협회(북미 한인 정치단체의 효시) 건물은 파월 가 1038번지에 있었고, 엘리스 가(Ellis St.)에는 한인 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지진은 이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공립협회 회관과 대동보국회 건물, 예배당이 순식간에 붕괴되거나 전소되었습니다. 다행히 한인 사망자는 없었으나 약 50~80여 명의 한인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이재민이 된 한인들은 골든게이트 파크(Golden Gate Park) 천막 수용소로 흩어졌습니다.

Thousands of tents sheltering refugees of the earthquake. Source: California Geological Survey archives www.conservation.ca.gov/cgs/earthquakes/san-francisco


3. “굶어 죽을지언정 왜적의 돈은 받지 않겠다”

재난의 혼란을 틈타 일제는 영악한 외교적 공작을 펼쳤습니다. 일본 통감부와 영사는 “한인 사망자가 24명에 달한다”는 허위 보고를 본국에 보내고, 한국 정부가 일본 영사관을 통해 구제금 4,000환을 전달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이는 미주 한인들을 일본의 보호 아래 있는 ‘신민’으로 규정하려는 정치적 속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의 기개는 단호했습니다. 공립협회 총회장 송석준은 1906년 6월 24일, 역사에 남을 통고문을 발표합니다.

“우리가 굶어서 죽을지언정 일본 영사의 간섭은 받지 않아야 한다. … 동포의 곤란이 막심하더라도 일본 영사를 경유하여 주는 구휼금은 거절할 것이다.”


공립협회는 일본 영사를 직접 찾아가 허위 보고를 따져 물었고, 일본 영사로부터 구제물품을 몰래 받아 챙긴 전도사 문경호를 ‘친일자 및 협잡자’로 판정하여 퇴출시키는 결기를 보였습니다. 이는 미주 한인 사회가 일제의 간섭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는 ‘정신적 독립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4. 고국과 미국 사회가 보낸 ‘고귀한 도움’

한인들의 단호한 입장을 확인한 고종 황제(광무 황제)는 전달 경로를 바꿉니다. 일본 영사가 아닌, 뉴욕 선교부의 브라운 목사와 미국인 라클린을 통해 미화 1,900달러를 전달했습니다. 이는 당시 나라가 기우는 상황에서도 자국민을 지키려 했던 고국의 눈물겨운 정성이었습니다. 또한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모인 국내 의연금 592달러 50센트 역시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미국 사회 역시 한인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갈 곳 없는 15명의 한인에게 미 감리교회 구제부가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이민국 의사 쭈루시는 구호금 분배를 돕는 등 한인들의 자립을 지지했습니다.

5. 인종적 장벽을 넘은 연대: 수용소에서 핀 꽃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아시아계 이민자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각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대재앙 앞에서는 인종보다 ‘생존’과 ‘나눔’이 앞섰습니다.

  • 미국인들과의 나눔: 한인들은 골든게이트 파크 수용소에서 만난 미국인 이재민들과 비상식량을 나누었습니다. 하와이 농장에서 다져진 강인함과 정직함은 절망에 빠진 다른 민족들에게 신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 다민족 연대: 한인들은 중국인, 일본인 이재민들과 임시 천막을 나란히 치고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정치적 갈등은 잠시 뒤로 한 채, ‘샌프란시스코 시민’으로서 함께 도시의 재건을 꿈꾸었습니다.

6. 오클랜드와 새크라멘토로의 이주, 그리고 재건

샌프란시스코가 불길에 잠기자, 한인 40여 명은 베이를 건너 오클랜드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공립협회는 오클랜드 7가 1230번지에 임시 사무실을 열고 깨진 그릇을 맞추듯 한인 커뮤니티를 재건했습니다. 일부는 농사가 가능한 새크라멘토 지역으로 이주하여 훗날 미주 한인 경제의 근간이 되는 농업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놀랍게도 샌프란시스코는 이탈리아계 은행가 아마데오 지아니니(Amadeo Giannini, 훗날 뱅크 오브 아메리카 설립자)의 무상 대부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불과 9년 만에 도시 기능을 완벽히 회복했습니다. 1930년대 금문교와 베이 브리지가 건설되며 현대적인 항만 도시로 거듭날 때, 한인 사회 역시 그 성장의 궤적을 함께하며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자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7. 에필로그: 1906년이 우리에게 남긴 것

1906년 대지진은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에게 단순한 재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적 자존심을 시험받은 사건’이자, ‘고국과 동포가 하나로 연결된 경험’이었습니다.

일본의 돈을 거절하고 고국에서 온 눈물 어린 1,900달러로 회관을 다시 지었던 그 정신은, 훗날 샌프란시스코가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거쳐 가는 ‘독립의 관문’이 되는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안개는 지진의 상처를 덮었지만, 폐허 위에서 보여준 한인들의 기개는 오늘날 샌프란시스코 1920의 역사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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