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 온 초기 이민들에게 맨 먼저 닥친 시련은 상투를 자르는 일이었다. 1895년 고종은 이미 전국적으로 단발령을 내렸으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따르지 않고 여전히 상투를 틀고 다녔다.
이민을 신청한 사람들은 동서개발회사, 수민원 등의 권고로 상투를 자르기도 했지만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은 상투를 튼 채 하와이까지 왔다. 그런데 하와이에 도착해 보니 상투를 튼 모습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농장에서 일하며 관리하기도 어려웠다. 계속되는 단발 권유도 뿌리치기 힘들었으나, 그래도 수개월씩 버티면서 상투를 틀고 지냈던 것은 돈만 벌면 다시 귀국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초기 이민들은 의복에서도 변화를 경험했다. 제물포를 떠난 배가 경유지인 일본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이민회사 직원들이 신체검사 후 남자들에게 서양식 양복을 한 벌씩 나눠 준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의식의 변화도 겪었는데, 이민선에 올라탄 사람들의 대부분은 뿌리 깊은 유교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를테면 너무도 당연한 ‘남녀칠세부동석’이 배 안에서 당장 깨져버린 것이다. 넓지도 않은 밀폐된 선실에서 오랜 날들을 남녀가 뒤섞여 지내야 하는 환경은 모두에게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이 한 달여를 같은 배로 타고 가야하는 생활여건은 결국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고, 하와이에 도착할 즈음엔 낯설었던 남녀의 마주침이 친숙하게 변해 있었다.
이미 알렌 공사가 하와이 주지사에게 한국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유순하며 일을 열심히 한다고 편지했듯이, 하와이에 도착한 초기 이민들은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맡겨진 일은 잘 가꾸어진 사탕수수 밭에서 경작을 하는 농사일이 아니라 사탕수수 농장을 만드는 거칠고 험한 일이었다.
한 손에 도끼를 든 그들은 한 발자국씩 원시림으로 가득한 밀림 속을 헤치며 나무들을 찍어나갔다. 섭씨 40도 가까운 땡볕 더위에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손발이 피투성이가 된 채 사탕수수밭을 개간하며 평평한 평지로 만드는 일을 했다.
그들은 새벽 5시까지 원시림에 도착해 오전 11시 30분까지 일을 하고 점심시간을 겸한 30분간 휴식이 허용됐다. 12시부터 다시 일하기 시작해 오후 3시경에는 일이 끝난다. 오후 3시가 지나면 기온이 높아져 더 이상 농장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의 평균기온은 화씨 100도를 오르내렸다.
농장에서 일하는 시간에는 외국인 십장들의 감시가 심했는데, 담배를 즐기던 한인들이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것은 물론 허리도 마음 놓고 펼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이름 대신 각자에게 주어진 번호로 불렸는데 그들을 관할하는 십장들은 가죽채찍으로 땅을 내리치며 더욱 힘내 일할 것을 끊임없이 종용했다. 살가죽이 벗겨지는 땡볕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돌아와 간신히 잠자리에 누우면 사지가 결리고 아파 끙끙거리고 서로가 그 소리에 제대로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고 한다.
하루 임금은 69센트였는데 당시 성인 남자가 받는 임금으로는 최저 수준이었다. 가끔 부인이나 미성년자가 일을 할 때도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50센트를 지급했다. 한 달 월급이 18달러인 셈이었다. 이 중에서 식비 6~7달러를 제하고 의복과 잡비로 2~3달러를 썼다. 다른 곳에 일체 돈을 쓰지 않고 모으면 한 달에 8달러 정도 저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데쉴러가 차용해준 선박비는 제대로 갚지 않았다는데, 어떤 이들은 그 돈을 물기 위해 계약기간까지 일을 하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다는 사람들도 있다.
기숙사에는 한 방에 4~5명이 동거했는데, 부인이나 아이들이 딸린 사람에게는 별도로 작은 방을 내주었다. 홀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따로 방을 가진다는 것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와이 농장에서 초기 이민 한인노동자들은 부당한 차별대우, 인격적 무시를 당하면서도 항의하지 못했다. 언어 소통이 안 되는 데다 잘못했다간 직장을 잃고 미국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통역관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월급은 노동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들은 직업상 자연히 농장주 편이 되어 일꾼들을 독려해야만 했다. 당시 한인들의 반일감정은 대단해서, 하와이 일본 영사관에서는 일본인에게 되도록이면 한인들을 피하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한인들은 문화적으로 일본인들을 못 견뎌했는데, 즉 일본 남자들이 옷을 입지 않은 채 훈도시라는 속옷만 입고 있다든지, 남녀혼탕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한인들에겐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한인 노동자들 중엔 조국에서 사탕수수 농장에서처럼 힘든 노동을 해보지 않은 이들이 태반이었다. 고된 일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그들은 기회만 생기면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또한 사시사철이 뚜렷한 기후에 살던 그들에게 무덥기만 한 기후는 견디기 힘들었다. 마침내 하와이가 미국령이 되어 본토로 이주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그들은 대거 이주를 했다. 그 숫자가 천 명이 넘었다. 여성들의 노동도 남자보다 결코 쉽지는 않았다.
오전 4시에 기상해 대부분 혼자 온 노동자들의 아침과 점심을 준비해 주고, 땀과 피로 물든 노동자들의 빨래를 하고 나면 다시 저녁준비를 해야 하는 등 종일 호된 가사노동에 시달렸다. 당시 그들이 시간을 알 수 있던 것은 농장에서 불어주는 호각소리였는데, 그들은 모든 시간을 그 소리로 계산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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