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선조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다. 어떤 분은 당시의 신문을 1호부터 모아 보존하였다가 남겨 두었고 어떤 분은 자서전을 어떤 분은 사진을 남겨 두었다. 특히 소니아 선우와 민병용 같은 분은 첫 이민이 살아 계시는 동안 인터뷰를 통해 그 분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놓아 훗날 사료로 사용되게 했다. 특히 자서전은 한 인물의 일생을 통한 당시 사람들이 살던 모습과 시대상,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자연스레 볼 수 있게 하는 좋은 기록물이다. 사람은 가도 글은 영원히 남아 이민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노신태
1905년 하와이에 이민 와서 사탕수수밭에서 일을 하다 다음해 샌프란시스코로 왔으나 1906년 대지진으로 직장을 얻지 못했다.
새크라멘토로 가서 17년간 농장 일을 했다. 사진약혼을 하고 9년 만인 1923년 5월 15일 샌프란시스코로 온 사진신부를 맞았다.
미국에 도착한 신부 노정순은 농장에서 일하는 남편이 겨울에는 일이 없어 놀게 되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남편에게 무엇이든 기술을 배우길 바랐다. 노신태는 친구에게 125달러를 빌려 3개월간 사업을 배우는 학교에도 갔으나 마땅한 사업을 찾지는 못했다.
그 후 오클랜드에 있는 친구가 하는 이발소에서 이발하는 기술을 배워 1926년에 이발사 면허를 얻고 오클랜드 7th St.에 가게를 열었다. 이 때 이발 요금은 75센트를 받았는데 가게 세로 $40을 내고 집세로 $12.50을 내면 끼니가 어려웠다. 이렇게 되자 한동안은 오클랜드 감리교회 임정구목사의 도움으로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주는(지금의 웰페어와 같은) 돈을 타서 생활했다. 당시 노신태 가족이 먹었던 음식은 배추 국과 밥이 전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후에 이발소가 잘 되어 1941년에는 하루에 35-45달러를 벌었다. 돈을 모아 오클랜드 항에 도착하는 선원들을 위한 공중목욕탕을 차려 많은 수입을 올렸다. 1942년에는 딸의 이름으로 호텔까지 샀는데 당시에는 시민권자 만이 건물을 살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1945년에는 한 달 수입이 2천 달러나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노신태는 오클랜드 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어 목사가 없는 동안 교회를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독립운동과 한인사회에 많은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도라 김
도라 김의 아버지 염만석은 1904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당시 철로공사가 한창이던 유니온 퍼시픽 철도공사장에 일을 하였다. 그의 어머니 김항신은 사진신부로 1920년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배의 제일 밑창을 타고 왔는데 배 멀미로 사방에 토하고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일행 중 몇 명은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적십자사 한인여성회 일원으로 적십자사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아버지 염만석은 1913년 안창호가 창립한 흥사단의 창립위원 8명중의 한 사람으로 각도 대표 중 강원도 대표를 맡았었다. 평생 흥사단원으로 있던 그는 샌프란시스코 퍼시픽과 커니 길 코너에서 담배 가게를 하였다. 미스터리라는 사람과 동업으로 ‘Lee’s Lunch’라는 식당도 같이 운영했다.
차이나타운에 잭슨과 커니 코너에 있던 이 식당에서 아버지는 일주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에 16시간씩 일을 했다. 식당 코너에는 하와이에서 온 총각들이 서성댔는데 돈 한 푼 없는 이들을 김치와 불고기로 대접했다. 1924년부터는 이민이 폐지되어 학생만이 유학을 올 수 있었을 때 돈 없이 유학 온 그들을 재워주고 먹여주며 자기 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했다.
당시 한인감리교회는 한인들이 모이는 유일한 장소로 오크 St.에 세를 들어 있었는데 교회 월세는 25달러였다. 아버지는 1937년 메이슨가에 4유닛으로 된 빌딩을 매입했다. 동양인은 건물을 살 수 없으므로 그는 변호사의 이름을 빌려서 샀는데 이곳에서 태어난 딸이 성인이 된 21살이 되어서야 집 명의를 옮길 수 있었다. 그 건물을 산 것은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건물을 산 것이었고 도라 김은 한국인으로는 첫 번째 집을 산 사람이 됐다.
1950년 골든게이트호텔을 인수하여 가족이 경영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으로 봉사하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매년 삼일절 기념식을 주관했다. 당시 서한나라는 여자는 차이나타운 YMCA 원장이었다. 도라 김은 1921년 3월16일 북가주 맨티카에서 태어났다. 오클랜드의 링컨 초등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진 파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UC 버클리에서 공부했다. 만년 학생으로 나이 60이 넘어서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에서 공부했다.
1942년 탐과 결혼한 그는 주정부 공무원으로 오래 일하였다. 도라 김의 동생은 한국휴전 회담 때 통역관으로 1954년까지 일했다.
194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시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부동산 중개인시험을 통과하고 부동산중개업자가 되었다. 부동산을 사고팔면서 아버지가 상대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였다. 1976년에 둘째아들 탐 김과 함께 상항한인봉사회 창립위원으로 노인들의 식사프로그램을 정부로부터 승인 받도록 하였다.
정부로부터 기금을 받아 내고 식단에는 김치를 매일 넣는 등 미주에 사는 외로운 노인들에게 더운 식사를 제공하는 큰일을 했다.
한인회관에 규칙적으로 근무하며 청소년 프로그램과 한인사회의 대변인으로 법정통역과 취업알선의 일을 하다 1986년 환갑에 은퇴하였다. 1979년에는 샌프란시스코 비즈니스전문 여성 클럽의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한인 커뮤니티에서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샌프란시스코 시와 카운티로부터 상을 받았다. 딸 진수영이 ‘Doing What Had To Be Done’이라는 도라 김에 관한 자서전을 1999년 출판했다.
박준섭
미국명이 쥴리아인 박준섭은 1895년 6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염한나는 미국본토에 들어온 최초의 한국여자였다. 아버지 박정숙은 러일전쟁으로 각기 외세를 등에 업은 조정의 인물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스럽던 구한말 왕실 책임자로 있었다. 초기 기독교인이었던 박정숙은 미국과 가까이 지내며 외세를 물리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로 인해 박 씨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임신 중인 그의 부인을 먼저 미국으로 보냈다. 임신한 몸으로 한 달 넘게 뱃길에 고생을 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이민국은 만삭의 여인을 바로 되돌려 보내지는 않았으나 아기를 낳은 후 한국으로 돌아가도록 추방명령을 내렸다. 염씨는 후에 1903년 최초의 이민 그룹에 끼어 하와이까지는 왔으나 샌프란시스코 친지 집에서 자라고 있는 아들은 보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을사보호조약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러 부인과 함께 하와이로 온 아버지는 신장염으로 미국 온지 얼마 안 되어 곧 사망했다. 어머니는 불법체류자가 되어 다시 한국으로 추방됐다. 박준섭은 샌프란시스코 동양인 빈민촌에서 자라면서 생계를 위해 접시 닦기 등 온갖 고생을 했다. 로웰고등학교를 다니다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는데 학업에 열중하여 프린스톤대학원에서 신학과 영문학을 졸업하게 됐다.
프린스턴 대학 신학과 최초의 동양인 졸업생으로 추정되는 그는 1923년 장로교 목사안수를 받고 유니온데일 포스터시 장로교회에서 시무하며 북가주 포스터시 고등학교 교장직도 겸했다. 그의 나이 65세가 되어서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1966년 은퇴할 때까지 필라델피아 던캔스빌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한 그는 인종차별과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인간애를 늘 강조했다. 은퇴 후에도 커뮤니티 봉사를 해오다 1981년 던캔스빌에서 사망하여 그곳 한인 타운 전체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
백광선(메리 백)
부모를 따라 1905년 다섯 살의 나이로 일본사람들이 쳐들어와 집을 뺏기는 바람에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 드렸던 아버지 백신구 목사는 초기의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일본에 의해 허물어져 가는 나라와 집을 떠나 가족이 공짜로 배를 타는 조건으로 1년 노동계약을 미국으로 왔다.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하고 하루에 50센트를 받았다. 백광선의 형제는 10명으로 인종차별과 배고픔으로 슬프고 힘든 삶을 살았으나 아버지의 믿음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았다. 리버사이드 소재 감귤농장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그곳에서 일하는 30-40명 홀아비들의 밥 짓는 일을 했다.
백인과 같은 동네에 살 수 없어 철도길 옆에 닭장 같은 판잣집 방 1칸에서 살았는데 그것은 1850년대 철도공사 일을 하던 중국 사람들이 살던 곳에 살았다. 땅바닥에 자며 취사에 방해가 된다며 어머니는 긴 머리를 잘랐다. 어머니는 사람들의 아침식사를 5시에 먹이려 3시30분이면 일어나 준비했다. 백 메리도 항상 3시에 일어나 점심 도시락까지 준비해 주어야 했다. 일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오후 7시에 저녁식사를 대려면 어머니는 종일 부엌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메리는 회상했다. 메리는 아기 돌보기와 불 때기 등으로 어머니를 도왔다. 그의 부모는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 윌로우스, 콜루사, 다뉴바 등으로 이주하면서 농사를 짓고 광산에서도 일했다. 한때는 새크라멘토에서 감자농사를 짓고 홀리스터에 살 때는 남의 집일을 하였다. 당시 미국사람들은 소의 내장은 먹지를 않았는데 그것을 얻어다가 국을 끓여 먹었다. 클레어몬트에 살 때는 손빨래를 집에서 하는 것으로 살았는데 백인들이 상대를 안 해 주어 백메리는 오빠와 선생님들에게 가서 애걸을 하여 일을 가져왔다.
1913년에 불황이던 시절 스탁톤에 가서 감자농사를 지었다. 후에 ‘백미왕’이라고 불리게 된 김종림이 농사지은 감자를 가지고 스탁톤시에 가서 팔려고 하는데 한 자루에 10센트라 해도 팔리지 않았다. 농사지은 수고한 보람도 없이 하나도 팔지 못하자 속이 상한 그는 강에다 모두 쏟아버리고 빈 자루로 돌아왔다. 그 다음해 그곳을 떠나 산호제에서 80마일을 가면 있는 Idria 수은 광산으로 갔다.
하루에 $5씩 받았는데 1차 대전이 시작하려던 전쟁초기라 수요가 많았다. 아버지는 이가 빠지고 혀가 까맣게 되고 눈이 나빠지는 등 그의 건강이 나빠져서 윌로우스에 가서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집에서 교회를 하였는데 두 세가정이 함께 매 주일에 예배를 드렸다. 당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자신도 글을 몰라 자식들을 국어교육을 시키지 못하였다. 미국에 온 사람들은 아나하임으로 이사하여 야채가게를 하여 돈을 많이 벌었으나 증권에 투자하였다가 1929년 폭락하자 망하였다.
메리백은 샌버니토 하이스쿨을 졸업하고 1919년 윌로우스에서 이홍만씨와 결혼하고 세 아들을 두었다. 메리백의 남편은 한인으로는 최초로 당시 미국 ‘벼농사의 왕’크로스와 10%의 계약을 맺었다.
크로스의 농사를 지어주고 수확의 10%를 얻게 되는 소작농이었다. 그는 3개 캠프에 1백여 명을 고용하고 4천500에이커 경작지를 맡는 등 활발한 농장사업을 펼쳤다.
1920년에는 풍작을 이루었으나 추수할 때 홍수와 1차 세계대전 후 쌀값이 폭락하여 벼농사를 포기하였다. 유타 주에서 사탕무를 재배하였으며 그곳에 한글학교를 시작하였다. 1921년 로스앤젤레스의 애나하임으로 이주하여 야채장사를 11년간 하였고 엘몬테에서는 오렌지, 레몬, 아보카도 등의 농사를 지었다.
메리 백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시 농사짓는 사람들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25-35센트로 10시간씩 일을 했으며, 1차 세계대전 후에는 75센트 내지 1달러로 올랐다. 1920년대의 생활비는 월 $10-$15가 필요했으나 전쟁 중에는 물가가 올라 $25는 있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농장, 세탁, 청소 등의 일로 돈을 모아 마켓을 경영하기도 했다.
1995년 2월 14일 알츠하이머를 앓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On Rock 양로원에서 별세하였다. 시신은 화장하여 로스앤젤레스 잉글우드 공원묘지 남편 곁에 묻혀있다.
선우학원
1918년 2월 2일 평남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8년 20세 되던 1903년에 하와이로 이민한 조부(선우 탄)를 찾아왔다. 당시 일본 도쿄 유학 중이었는데 ‘조선독립운동 서클’이란 지하운동에 가담하여 일본경관의 감시대상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왔던 것. 그의 미국 입국은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으로 가능했다.
미군에 입대하여 복무기간을 마친 그는 워싱턴대학, 스탠포드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미국 중앙정보부와 샌프란시스코 지방법원에서 통역관을 지냈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일본어 강사를 하며 정치학 박사 과정을 하고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교포 2세 소니아를 만나 결혼하였다. 시애틀로 이사하여 한국어를 가르치고 워싱턴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며 미국대학에 한국어과를 처음 설치하였다. 한국역사, 한국문화, 한국문학까지 가르쳤다.
젊었을 때 인종차별을 받아 아파트를 구할 수 없었던 것이 충격이었다. 이후 그는 평생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인권운동에 몸 바친다. 그의 장모 신경애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커니 호텔’을 경영했는데 그 호텔이나 인근에 머무는 군인들에게 자주 밥과 김치를 대접했다고 한다.
선우학원은 골든게이트 공원 옆 콜 St. 코너에서 ‘후드 랜드’라는 식품가게를 경영하였고 흥사단에서 열심히 일했다. 사상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그는 한때 모국 연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샌프란시스코 부시와 그랜트 코너에 위치한 ‘몰든 호텔’을 매입해 경영하기도 했다.
그 뒤에는 인근에 있는 3층짜리 빌딩을 매입하는 등 사업에서의 성공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버클리 태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샌프란시스코 마켓 스트리트에 위치한 트리니티 감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그 뒤에는 미조리 주의 센트럴 감리교 신학교에서 29년간 가르쳤다. 주요저서로는 ‘Korea: A Political History in Modern Times’와 ‘아리랑 그 슬픈 가락이여’외 다수가 있다.
안수산(安繡山, Susan Ahn Cuddy)
1915년 7월 5일 도산 안창호의 첫째 딸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1939년 샌디애고 주립대에서 사회경제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고교기숙사 카운셀러로 있었다. 1942년 12월 한인 2세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미 해군 소위로 입대했다. 동양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불합격이 되었다가 다시 응모하여 합격이 되었다. 수산은 1943년 3월27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74명중에 한 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여성의 몸으로 자원입대해, 미 해군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기교관으로 임관되어 한국의 독립지도자의 딸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었다고 화제가 되었다. 당시 도산의 세 자녀는 모두 군대에 있었는데 안수산은 해군대위, 안필립은 육군사병, 그리고 안필영은 해군사병이었다.
안수산은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첫 여성 포격술 장교가 되었다. 특히 해군특수부대 대위 때는 남자장교들의 전용물이던 전투기사격을 가르치던 첫 동양계 여성장교였다. 1945년 예편과 함께 워싱턴 D.C.의 National Security Agency의 민간정보요원이 되었다. 1959년 사직할 때까지 국가안전보장국(NSA)에서 동양계 여성으로 3백여 명의 민간정보원을 지휘하는 비밀정보 분석가로 미국에 공헌하였다. 미국인 해군준위와 결혼을 하였다.
부친이 설립한 흥사단 단원이었고 미주한인 광복단체인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The New Korea’의 영문편집을 맡기도 했다. LA에서 지금은 작고한 영화배우였던 오빠 안필립(작고・영화배우)과 함께 ‘문 게이트’라는 레스토랑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였다. 3・1여성동지회를 이끌며 도산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랑스러운 한인으로 살고 있다.
미주 한인이민 1세기를 기념해 캘리포니아 주 의회가 선정한 ‘올해의 여성상’을 2003년 3월 수상했다. 또한, 자신의 삶을 회고한 ‘Willow Tree Shade’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라는 영문판 자서전을 출판하기도 했다.
안영호
안창호의 사촌동생 안영호는 12살이던 1905년 먹을 것이 없던 한국을 떠나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안창호의 편지로 미국이 한국보다 살기가 낫다는 것을 알고 이주하기로 하였다. 나이가 어려 일은 못하고 한인 거주지 안에 미국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한 달에 $6을 내면 먹여주고 재워주었고 약 120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8살부터 14.15세까지의 아이들이었다. 15살에는 양복점에서 남자 옷을 만드는 재봉 일을 배웠다.
바지 만드는데 6개월, 코트 만드는데 6개월이 걸려 배우고 안원구라는 한국 사람이 하는 양복점에서 일을 했다.
1915년 샌프란시스코로 왔다가 여기저기를 다니며 농사일을 하였다. 트럭을 가지고 농장에서 과일과 야채를 사서 가게에 파는 일을 하였다. 북가주 Isleton라는 곳에 아스파라거스를 사러 갔다 새크라멘토에 살게 됐고 거기서 1925년 안 조앤과 결혼을 하였다.
당시 포도밭을 샀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2만 5천 달러를 잃었다. 홍수가 나서 한때는 벼농사로 수만 달러를 번적도 있으나 김종림과 다른 한인들과 함께 투자했던 자금을 다 잃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오클랜드 감리교회에서 부인과 함께 오래 봉사도 하였다.
차이석(Charr, Easurk Emsen)
1894년 평양에서 태어난 차이석은 1904년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의료선교를 펴려던 목적으로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350명의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과 함께 제물포를 떠났다. 일본에서 550명의 일본인을 더 태우고 호놀룰루에 도착하니 일요일이어야 하는데 토요일이라고 해서 이해를 하지 못했으나 배가 너무 빨리 와서 하루를 벌었다고 생각했다는 고백을 했다. 아버지는 당시 큰돈인 15달러를 주면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라고 했다. 하와이에서 배로 7일이 걸리는 본토로 가려면 30달러의 배 삯과 일 달러의 수고비가 있어야 했다
6개월간 농장에서 일을 하고 1905년 6월 26일에 ‘미국으로 들어오는 문’이라고 불리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닥터 드류의 도움으로 메디칼 검사를 무사히 마치고 노스비치 근처 Filbert St.에 황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호텔에 지냈다. 안창호의 도움으로 샌프란시스코 Van Ness에 가까운 Post St.에 있는 집에서 숙식을 하며 집안 일을 해주는 ‘School Boy’일을 시작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불을 때고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낮에는 학교에 다니는 일이었다. 토요일에는 대청소를 하였으며 일주일에 2달러를 받았다. 북가주 Vacaville에서 자두와 복숭아, 배를 따는 일을 하고 하루에 1불 15센트를 받았다. Malaga에서 포도를 따서 한 쟁반에 2센트를 받고 Fresno에서는 포도를 따고 1박스에 3센트를 받았다. 리버사이드에서는 오렌지를 땄고 그곳에서 초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하여 학교를 다녔다.
호텔버스보이 접시 닦는 일을 했다. 신한민보의 type-setter로 일을 하고 레익 타호 호텔에서도 일을 했다.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일을 보던 중 선교사 멕퀸을 만나 미조리주에 있는 Park College에서 공부하고 1923년 졸업하였다. 1918년 4월 군대에 징집되어 의무관으로 있었다. 시민권자가 아니면서도 자원하여 1차 세계대전 때 군대에 복무했다. 3.1운동이후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일제의 부당성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고 미국교회에서 수차례 강연을 했다. 늘 못 잊어 하던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지 19년 만인 1931년에 Townsend St.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 내렸다. 이발학교에 1000시간을 일하고 2 달러에 이발 면허를 얻고 차이나타운에 이발소에서 일했다.
의사가 되어 고국에 돌아가 의료선교가 꿈이었으나 이발사가 되었으나 옛날 의사가 없던 시절에는 이발사가 그 역할을 했던 것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옷도 같은 하얀 가운이라고 생각한다. 학생이 아니면 미국에 거주 할 수가 없던 당시 유학생이던 부인과 결혼했다. 1932년 당시 음악학교를 다니던 부인이 둘째 아이를 낳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워싱턴으로 자신이 군대에 복무하였으며 부인이 이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그러자 이민국은 부인에게 아이를 낳은 후 6주 후에 미국을 떠나도록 추방명령을 내렸다. 아이를 낳자 앤젤 아일랜드의 이민국에서 부인을 인터뷰하러 나왔다. 같은 종족이랑 결혼하려고 유학생과 결혼을 했는데 그것은 연방정부 법에 위반되는 것이고, 또 당시 미국여자랑 결혼을 하는 것은 주법에 위반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군 관계자와 학교에서 알던 모든 영향력 있는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 지원을 청했다. 그 사람들은 항의서신과 도움을 청하는 서신을 워싱톤으로 보냈다. 부인은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체류를 보장하는 편지를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으로부터 받게 되고 그 일이 연유가 되어 차이석도 그처럼 거절당했던 시민권을 받게 된다.
1918년 4월 5일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자서전인 ‘The Golden Mountain’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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