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태어난 한사 김호는 본명이 김정진이다. 1912년 중국으로 망명할 때 김호로 개명하여 국경을 통과하였다. 한성학교(경기고 전신 1회)에 다니며 신식교육을 받고 어머니를 따라 정동교회에 다녔다.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 이화, 영흥학교와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에서 신학문을 가르쳤다.
조국을 떠날 때까지 가르쳤던 대성학교 독립사상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하여 일본국기 불게양(국기를 높이 달지 않는) 운동을 전개해 1912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일제에 의해 폐교됐다. 김호는 이 학교를 떠나 조국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상해에서 3년간 차를 운전하는 일을 직업으로 돈을 모아 미국 행 여비를 마련해 1914년 7월25일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생활비 마련을 위해 처음에는 노동을 하였지만 생활이 펴감에 따라 재미한인사회의 모습과 조국의 독립에 늘 관심을 쏟고 애국애족 사업을 늘 후원하였다. 1919년 국제적 외교활동을 위해 노동 사회개진당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후 샌프란시스코 국민중앙총회의 특파원이 되어 미주 서부지역을 2개월 동안 순회하며 만 달러 이상의 독립자금을 수집하였다. 이 기금은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재정에 절대적인 한 몫을 하였다.
1920년 중가주 리들리로 이사하여 김형순과 동업으로 김형제 상회를 설립하였다. 이 사업의 성공으로 많은 독립자금을 보내게 되며 하와이에서 본토로 이주한 한인과 유학생에게 직장을 제공하였다. 그는 자두와 복숭아를 접종한 넥타린(털 없는 복숭아) 개발에 성공한 인물이다. Le Grand와 Sun Grand 상표로 넥타린을 미 전국에 공급하게 되는데 6개 농장 5백 에이커에서 나오는 넥타린이 모자라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수백 명의 한인을 고용하였으며 과일 포장회사를 차려 도매상에 공급하였다. 성수기에는 120대의 트럭이 동원된 사실로 그의 사업규모가 어마했음을 알려준다. 1937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1945년, 1949년에도 다시 총회장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한인 국방군 편성계획을 미육군사령부에 제출하고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 맹호군을 창설했다. 1936년 6월에 단체 부흥 운동에 참가하여 북미 대한인국민회의 제도를 개량하고 1937년 1월 제 1차 중앙집행위원장에 당선되어 북미 한인사회를 위해 활동했다. 전 미주의 한인 정치단체를 통일한 1941년 재미 한족연합위원회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1942년 로스앤젤레스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42년 8월29일 국치일에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국기를 게양하도록 주선하여 전 미주 한인들을 감격하게 하고 흥분에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또한 월간잡지 ‘한국의 소리’를 발간하여 적극적으로 한국의 입장을 홍보하였다. 1944년 한족연합회는 워싱톤 DC에 외교사무소를 설치하는데, 김호는 김원용과 함께 외교위원에 선임됐다. 1945년 임시정부는 김호를 연합국회의 대표자로 선임해 국내로 불러들이고 1946년 12월에는 남한과도입법위원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김호는 1949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활약했다. 1957년 5월 리들리 지역 한인재단을 설립하고 단장으로 봉사했다. 사망 후에는 리들리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가 2003년 9월 대전국립묘지에 이장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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