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1878-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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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1878-1938)는 1902년 미국에 공부를 하려고 왔다. 그러나 당시 미주한인들이 구심점 없이 방황하고 있는 모습에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한인사회 계몽운동에 나서게 된다.

구습과 패배주의적 발상에 매인 동포들의 변화와 개조를 강조하며 소망을 주려고 애쓴 사상가였고 생활 운동가였다. 도산은 재미 한인공동체 발전과 결속이 곧 나라를 찾을 수 있는 힘이라고 믿었다. 인재양성과 경제 부흥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고 민족의 자긍심도 키워낼 수 있다고 믿은, 미주 한인 초기 이민의 대부와 같은 인물이다.

서재필과 함께

도산은 1878년 11월12일 평남 강서군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가난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에 부친을 여위고 조부슬하에서 자랐다. 서당에 다니며 서너 살 위의 필대은과 친분을 맺으며 신학문에 접하게 됐다. 우리나라 땅에서 일어나는 청일간의 세력다툼을 보고 울분을 느끼고 신학문을 배울 것을 결심한 그는 1894년 상경하여 정동에 있는 구세학당(경신학교 전신)에 들어갔다. 3년간 수학하여 보통과를 졸업하고 조교가 됐다. 이 학교에서 서구인들의 세계관에 눈을 뜨고 필대은과 함께 예수교에 입교한 후 새문안교회를 다녔다. 19세 때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과 함께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였다.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 공동회의를 개최하고 처음 대중 앞에 연설을 하여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그 후 약 3년간 경기, 황해, 평안도 등을 순회하며 국민의 자각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게 된다.

21세에 강서군 동진면 안화리에 점진학교를 설립하여 민중에게 신학문의 길을 열어주었다. 24세 때 정신여고를 나온 이혜련과 결혼하고 신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넓고 푸른 태평양 바다만 보고 여러 날을 가다, 홀연히 섬이 나타나자 “오! 그리운 육지의 섬(島), 그 섬의 푸른 산(山)!”이라고 감탄하며 그 자리에서 자신의 호를 ‘도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

1902년 9월 캐나다 뱅쿠버 항에 도착한 그는 시애틀을 경유해 10월 14일 24세의 나이로 샌프란시스코에 왔다. 그의 여권은 한인여권(여권번호 51호)으로는 미주 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길을 가다가 한인 두 사람이 한길에서 상투를 마주잡고 싸우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주변에는 미국인들이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고 있었다. 도산은 당장 뛰어들어 싸움을 말리고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한인 인삼 상인들이었는데 화교들을 상대로 협정한 판매구역을 한사람이 범해서 다툰다고 했다.

이 일은 도산에게 큰 충격이었다. 조국을 등지고 멀리 까지 와서 같은 민족끼리 작은 이권 때문에 싸운다는 것은, 도산으로선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뒤 도산은 동포들의 생활상을 두루 알아보게 된다. 세 들어 사는 그들의 생활 상태는 불결하기가 짝이 없었고. 말소리는 크고 말도 많아 이웃 사람들이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에 대한 상식이나 지식은 전무 했다. 도산은 동포들이 이렇다면 미국인들이 우리를 미개인으로 보고 독립국의 자격도 없다고 볼 것으로 여겼다.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로 미국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필요하면 어떤 상황이든 공부를 마다 않겠다는 훌륭한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공부보다 나라를 찾고 한인사회의 계몽운동을 펼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긴 그는 당분간 공부를 포기하더라도 동포들을 위한 계몽이 시급하다고 느꼈다.

그는 먼저 청소운동부터 시작했다. 동포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창을 닦고 커튼을 치고 문 앞에 화분을 놓거나 꽃씨를 뿌렸다.

변소와 부엌을 깨끗이 치우는 일종의 환경혁명이 일어나자 동포들은 어느새 면도도 자주하고 의복도 단정해졌다. 갑자기 달라지는 교포들의 모습에 한인에게 세를 주던 주인은 도산을 만나보고는 젊은 나이에 그런 일을 하는 그에게 감동하였다. 도산을 돕고 싶던 그는 한인들이 모일 장소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그곳에서 처음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도산은 우선 인삼상인들에게 협정가격을 정해주고 판매구역을 한 달씩 바꾸도록 하여 경쟁 때문에 인삼 값이 떨어지는 폐단을 없이 했다.

상항친목회를 조직하여 한인 노동력을 통합 공급하는 기관을 만든 그는, 미국인에게 노동력 주문을 받고 공급하되 최저임금은 보장하도록 요구했다.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공립신보를 발간하고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여러 도시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과 하와이, 멕시코에 있는 동포까지 합하여 대한인국민회를 형성하였다. 당시 미국에 새로 입국하는 한인은 여권이 없거나 법정 휴대금이 없어도 국민회에서 이민국에 보증을 하면 통과될 정도가 됐다. 사업주가 노동력이 필요하면 국민회를 통해 요청했고 사업주와 동포간의 이해 충돌이 있을 때에는 국민회가 나서서 중재해 동포의 이익을 보호했다.

1903년 9월 23일 도산은 미주한인사회 최초의 모임이며 민족운동의 출발이 되는 ‘상항한인친목회’를 조직했다. 그 뒤 리버사이드에서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친목회를 명실상부한 미주한인의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로 발전시켰다.

초대회장이 된 그해 11월 27일에는 샌프란시스코 퍼시픽가 938호 3층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1907년 귀국 길에 일본에 들러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에서 시국강연을 했는데 많은 학생들을 감동시켰다. 그들은 그 해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된다. 도산은 국권회복단체인 신민회 조직을 맡아 규칙서와 세칙을 마련했다. 신민회는 교육과 산업의 양대 사업을 목표로 하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평양 마산동에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 회사는 신민회의 경제적 뒷받침이 됐다. 평양, 서울, 대구에 태극서관이라는 서점을 열었던 그는, 1909년 흥사단의 전신인 국내 최초의 청년 운동단체 청년학우회를 창설했다.

1909년 2월 미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해외에 체류하는 한인들의 단체가 통합하여 국민회가 조직되었다. 국민회는 1912년 대한인국민회가 되는데 도산은 초대회장에 추대되어 재외한인들의 구국운동을 지도하게 된다. 그 해 국내에서도 국민회와 비슷한 성격으로 전 국민의 조직화를 착수했는데,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자 혐의를 받게 된 그는 용산 헌병대에 체포되어 두 달간 수감생활을 했다. 1910년 일제 통감부의 이토 히로부미는 안창호내각을 만들 것을 제의하나 거부하였다. 한일합방이 있은 다음해인 1911년 도산은 해외망명길에 오른다.

도산은 조국의 독립은 오직 우리 민족이 조국을 찾을 만한 힘을 길러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조국의 강산과 동포에 보내는 유명한 ‘거국가’를 남기고 영광을 회복할 훗날을 기약하면서 도산은 일제치하의 조국을 떠났다. 해삼이 많이 나서 해삼위라고도 불린 블라디보스톡에 머무는 동안 독립군 양성과 기지설립을 구상하고 이상촌 건설 부지를 찾아 만주를 답사했다. 중국 청도에서 망명자들을 모아 청도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당장 일본에 무력적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파와 동포의 산업을 진흥시키고 교육을 보급시켜 준비하자는 파로 나뉘어 합의를 보지 못했다. 한편 나라를 잃고 망명한 그의 국적은 국경을 넘을 때마다 문제가 됐다. ‘한국 신민’이라는 옛날 여행권을 일본과의 동맹국이던 영국에서는 ‘일본 신민’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도산은 자신은 정치 망명가이므로 일본 신민이 될 수 없다고 주장, 결국은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후 도산은 미국에서 발행한 ‘무여권(without passport)’이라는 신분으로 여행하게 되는데 이는 ‘국적 없는 국민’을 뜻하는 것이었다.

안창호의 여권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초대회장이 되었는데, 1913년부터 대한인국민회는 미 국무성과캘리포니아 주 정부로부터 자치단체의 자격과 권위를 인정받아 한인사회의 자치와 권익을 크게 신장시켰다.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강영소의 집에서 한국 8도를 대표할 청년 8명을 비롯해 25명을 모아 흥사단을 조직했다. 지방색과 분파주의를 타파하고 독립운동을 이끌 정예부대를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 무실역행, 건전인격, 단결훈련, 국민개업 등 정신개조를 목표로 동맹 수련하는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며 국민회 운동에 전력했다. 1917년에는 멕시코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잘못된 이민으로 고통 받는 동포들을 심방하고 한인사회를 위해 활동하다 이듬해에 돌아왔다.

1919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을 대표로 선출하여 파리강화회의 국민대표로 파견하여 한국문제를 제의하려 노력했다. 곧 이어 3.1 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내무총장이 되어 상해로 다시 떠났다. 미국으로 간지 7년 7개월 만이었다.

상해에서의 활동

도산 안창호는 1919년 5월25일 미주 국민회가 모은 2만5천 달러를 갖고 상해에 도착했는데 미주 동포들의 도움은 임시정부 청사마련에 큰 힘이 되었다. 1919년 6월 28일 상해에서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한 도산은 연통제를 실시, 국외조직을 국내와 연계하여 그 위에 독립운동 조직을 발달시켰다. 국내에서 9월 내각개조로 국무위원 노동국 총장이 되자 내무총장에서 스스로 자신을 격하시키면서까지 임시정부 내부의 분열을 단합으로 바꾸려 애썼다. 독립신문 발간 등 동년 7월 2일에는 임시사료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총재가 되어 이광수와 더불어 한일관계사료 전 4권을 편찬 발행했다. 국민대표회의를 여는데 힘쓰고 한국독립당을 만들었다. 임시정부 후원회를 조직하여 해외교포들에게 군자금을 출연할 것을 호소했다.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을 발간하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지도했다. 1920년 1월 15일에는 흥사단 사업에 착수하고 대한광복군 총영을 남만주에 설치케 하였다.

1920년 6월 18일 극동을 순방하는 미국의원 시찰단, 미의회 상하원의원 9명이 가족동반 관광으로 한국을 통과하게 되었다. 도산은 미국의원단 접촉 준비회를 결성하여 환영준비위원장이 되어, 북경에서 의원단 일행을 맞이해 한국 독립 지원을 호소했다. 윤치호 원작의 애국가를 시대에 맞게 보완하여 애창하도록 하였다. 1921년에는 서울에 수양동맹회, 평양에 동우구락부를 설립했다. 후에 두 단체는 수양동우회로 통합된다.

1921년 이승만과의 불화로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사퇴했다. 그 뒤 여러 차례 국무총리 추대를 받지만 사양했다.

1923년 1월 3일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미주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임시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대표회의가 개조론과 창조론으로 심하게 대립되자 북만주로 가서 독립운동기지인 이상촌 건립을 추진하며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이상촌 건설운동을 편다.

1924년에는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여 해외로 유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준비시키고 실력배양을 돕는다. 192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 조직을 강화했다. 이상촌을 건설할 투자금과 가입자를 모집하고 미주에서 임시정부 유지비 지원을 주도했다. 도산이 이끌고 있는 국민회는 임시정부에 사람마다 인구세를 납부했다. 다시 상해로 건너가 1926년 2월 20일 상해 임시정부 3대 국무령으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군사, 외교, 재정, 문화, 식산, 통일 등 6대 방향으로 독립운동의 나갈 길을 정하고 대독립당 결성을 토의했다. 그 때 20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중국 경찰에 감금되었다. 20일 만에 석방된 그는 더욱 열성적으로 이상촌 건설에 힘쓰지만 김좌진, 정진 등이 암살되는 수난이 계속되고 만주사변까지 발생, 결국 그 계획을 접고 만다. 그는 중국에서 통합임시정부, 국민대표회와 유일당 운동을 주도했다.

1928년 3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1929년에는 필리핀 교민사회를 방문하고 파인즈 마을을 돌아보고 이상촌 건설지를 물색했다.

1930년에는 생활역량을 넓히기 위한 ‘동인호조사’를 조직해 상해 한인들의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1931년 1월에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를 주재하여 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흥사단보를 발행하여 흥사단의 이념을 널리 알렸다. 또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의 주관으로 국내에서 ‘동광’잡지를 발간하였다. 애국부인회가 흥사단의 취지에 따라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우자 동인호조사를 공평사로 개칭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도산은 공평사를 통해 생활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소비, 신용, 생산 등의 합작운동을 추진했다. 같은 해 만보산 사건으로 한인과 중국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중국인의 한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자 병인의용대, 노병회, 교민단, 학우회, 여자청년동맹, 애국부인회, 청년동맹등의 각 단체가 연합되어 ‘상해한인단체연합회’를 조직하게 된다. 도산은 여기에 흥사단 대표로 참가하여 중국과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게 되는데 1931년 10월에는 이시영 등과 교민단 심판원으로 활동했다.

한창 활동이 무르익던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가 발생하자 일경은 독립운동가의 일제 검거에 나섰다. 도산은 이런 일을 알면서도 상해 한인거류민단장 이유필의 어린 아들과 약속한 소년단 기부금 2원을 전달하기 위해 상해 하비로에 있는 이유필의 집으로 간다. 여러 동지들이 극구 만류했지만 도산은 “어린이에게 실망과 불신을 주어선 안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던 도산은 그곳에서 프랑스경찰관에 체포영장 없이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에 넘겨졌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대전 두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35년 대전 감옥에서 위장병의 악화로 출옥한 그는 일경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지방을 순회하며 계몽강연을 했다. 그 후, 평남 대보산에 은거하며 이상촌 건설을 계획하였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91명과 함께 일경에 다시 체포되었다. 옥살이를 하던 중 ‘간 결핵 겸 결핵성 복막염’으로 동년 12월 보석 출감한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입원 가료 중 1938년 3월 10일 12시 6분 60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일경은 “안창호는 동우회 사건의 피고의 몸이었으니 정식 장례를 불허하고 가족도 상복을 입을 수 없다. 물론 상여 뒤에 조객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탄압했다. 이에 분노한 오기영은 “상주에게 상복도 못 입히는 것이 무사도냐”고 항의하고 이는 일본 정치의 아량 없음을 드러내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라 상주만은 상복을 입고 조객으로는 특별히 허락 받은 조만식만 뒤를 따랐다. 조문객보다 멀리 물러선 사복 경관이 더 많은 기이한 장례였다. 묘지에 이르는 연로에는 경관들이 경호하듯 늘어서서 일체의 자동차 통행을 금했다. 총독부는 도산 사후 민심의 동요를 꺼려 일체 보도를 통제하고, 선산 대신 망우리 공동묘지에 20여명 정도의 친족 및 기독교 교우만 입회시킨 가운데 시신을 매장토록 했다. 친지들은 무덤가에 무궁화를 심었는데 일본경찰은“이를 베어 버리고 사꾸라를 심으라”고 간섭했다.

도산은 그의 60평생 중 34년을 대한민국에서, 13년을 상해에서, 13년을 미주에서 보냈다.

정부에서는 도산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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