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엠바카데로 역에 내려 페리 빌딩의 웅장함에 잠시 숨을 고르고, 북쪽 금문교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부두(Pier)들의 행렬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페리 빌딩에서 시작해 피어 39를 지나 피셔맨스 워프까지 걸으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페리 빌딩을 중심으로 북쪽 부두들은 홀수 번호, 남쪽 부두들은 짝수 번호를 달고 있다는 사실이었죠! 마치 도시가 숨겨둔 비밀 코드를 발견한 듯한 이 작은 발견은 샌프란시스코 부두들의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이 수많은 부두들은 왜, 언제부터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요? 단순히 배를 대는 곳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요? 샌프란시스코 만 안쪽, 태평양과 만을 잇는 그 유명한 골든 게이트(Golden Gate) 너머로 이어졌을 해상 교통과 상업의 역사가 이 부두들 위에 켜켜이 쌓여 있을 것만 같습니다.
잠깐, 여기서 ‘골든 게이트’라는 이름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먼저 풀어볼까요? 흔히 이 이름 때문에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의 황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사실 이 매혹적인 해협의 이름은 그보다 앞서 붙여졌습니다. 1846년, 미국의 탐험가이자 군인이었던 존 C. 프리몬트(John C. Frémont)는 이 좁고 역동적인 해협을 보며 고대 콘스탄티노플의 아름다운 항구 ‘골든 혼(Golden Horn)’에 비유하여 ‘크리소필레(Chrysopylae)’, 즉 그리스어로 ‘황금의 문’이라 명명했습니다. 골드러시 시대의 눈부신 황금이 아닌,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드는 해협의 아름다움이나 아시아와의 무역 관문으로서의 중요성을 예견한 이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황금의 문’이 오랫동안 유럽 탐험가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샌프란시스코 만의 변화무쌍한 날씨, 특히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해협을 뒤덮는 짙은 바다 안개 때문이었죠. 마치 신비로운 베일에 싸여 숨겨져 있던 보물처럼 말입니다. 1769년이 되어서야 스페인 탐험가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Gaspar de Portolà)의 육로 탐험대에 의해 비로소 그 존재가 확인되었으니, 얼마나 오랫동안 비밀을 간직한 관문이었을까요? 이 안개 낀 황금의 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펼쳐지는 광활한 샌프란시스코 만, 그리고 그 안쪽에 자리 잡게 될 수많은 부두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신비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저처럼 이런 궁금증을 가진 여행자들을 위해, 오늘은 샌프란시스코 부두들의 매력적인 세계로 함께 떠나보려 합니다.
부두의 탄생: 골드러시와 샌프란시스코의 성장
샌프란시스코 부두의 역사는 19세기 중반, 골드러시의 열기와 함께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황금을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도시는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밀려드는 물자와 사람들을 감당하기 위한 항만 시설이 절실해졌죠. 이때부터 샌프란시스코 만의 해안선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878년부터 40년에 걸쳐 건설된 **엠바카데로 방파제(Embarcadero Seawall)**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부두들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견고한 방파제 위에 마치 손가락처럼 바다를 향해 쭉 뻗은 ‘피어(Pier)’들이 하나둘 건설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참, 여기서 잠깐! **’피어(Pier)’와 ‘워프(Wharf)’**는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가 흔히 혼용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차이가 있습니다. 피어는 방금 언급했듯 해안선에서 바다 쪽으로 돌출된 구조물로, 배가 정박하고 화물을 싣고 내리는 데 용이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반면 워프는 해안선을 따라 길게 조성된 부두 시설을 말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며, 특히 엠바카데로를 따라 늘어선 번호 붙은 부두들은 대부분 ‘피어’에 해당합니다.
20세기 초중반까지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 연안의 주요 해운 중심지였습니다. 수많은 피어들은 내륙 수로를 통해 새크라멘토 델타 지역으로 향하는 화물선들로 붐볐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태평양 전선으로 향하는 군인과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후 컨테이너선이 등장하면서 대부분의 상업 해운은 더 넓은 공간과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만 건너편 오클랜드 항으로 옮겨갔고, 샌프란시스코의 피어들은 한동안 쇠퇴의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숫자를 따라 걷는 엠바카데로: 매력만점 홀수 번호 피어들
이제 본격적으로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홀수 번호 피어들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볼까요? 이 길은 여행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구간이기도 합니다.

- 페리 빌딩 (Ferry Building) & 피어 1 (Pier 1): 모든 이야기의 시작
엠바카데로의 상징이자 모든 피어 번호의 기준점인 페리 빌딩은 그 자체로 훌륭한 관광 명소입니다. 지금도 만 건너편으로 향하는 페리들이 분주히 오가며, 건물 내부는 미식가들을 유혹하는 식료품점과 레스토랑으로 가득합니다. 화, 목, 토요일에는 건물 앞에서 활기찬 파머스 마켓도 열리죠. 바로 옆 피어 1에는 유명 가구/생활용품점 ‘피어 1 임포츠(Pier 1 Imports)’의 이름이 이곳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 피어 1 1/2, 3, 5: 맛과 멋, 그리고 역사
이 구간은 **’센트럴 엠바카데로 피어 역사 지구(Central Embarcadero Piers Historic District)’**로 지정될 만큼 유서 깊은 곳입니다. 피어 1 1/2에는 개인 보트를 3시간 동안 무료로 정박할 수 있는 공공 선착장과 수상 택시 승강장이 있고, 페루 음식 전문점 ‘라 마르(La Mar)’가 자리해 있습니다. 피어 3은 혼블로어 요트 크루즈의 출발지이며, 유기농 레스토랑 ‘플랜트 카페 오가닉(The Plant Cafe Organic)’도 만날 수 있습니다. 피어 5에는 스페인 요리를 선보이는 ‘코케타(Coqueta)’가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습니다. - 피어 7 (Pier 7): 낭만적인 낚시와 도시의 스카이라인
길고 가느다란 형태의 피어 7은 벤치가 놓여 있어 잠시 쉬어가기 좋으며, 트랜스아메리카 피라미드 건물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멋진 뷰를 자랑합니다. 현지인들에게는 게나 상어, 농어 등을 낚는 인기 낚시터이기도 하죠. 특히 밤에는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과 함께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 피어 15 & 17 (Piers 15 & 17): 과학의 즐거움, 익스플로라토리움 (Exploratorium)
샌프란시스코의 자랑인 체험형 과학 박물관, 익스플로라토리움이 바로 이곳에 새 둥지를 틀었습니다. 과거의 낡은 부두가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인기 만점인 혁신적인 교육 및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재탄생한 성공적인 사례죠. 박물관은 만의 수질과 조류 등을 측정하는 NOAA 연구 부표와 연계해 시민 과학의 중심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 피어 23 (Pier 23): 현지 느낌 물씬, 피어 23 카페
이름부터 독특한 ‘피어 23 카페’는 허름하지만 매력적인 분위기의 식당입니다. 신선한 해산물 요리와 함께 뒤편 식사 공간에서 바라보는 만의 경치가 일품입니다. - 피어 27 & 29 (Piers 27 & 29): 크루즈 여행의 새로운 관문
피어 27은 2013년 아메리카스컵 요트 대회의 중심 시설이었으며, 현재는 샌프란시스코의 새로운 크루즈선 터미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거대한 크루즈선이 정박한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입니다. - 피어 33 (Pier 33): 알카트라즈로 향하는 유일한 길
악명 높은 감옥 섬, 알카트라즈로 향하는 페리가 출발하는 ‘알카트라즈 랜딩’이 바로 이곳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여행의 필수 코스 중 하나인 만큼 항상 많은 여행객으로 붐빕니다. - 피어 39 (Pier 39): 두말하면 잔소리! 샌프란시스코의 아이콘
쇼핑, 식사,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무엇보다 귀여운 바다사자들을 만날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 최고의 명소! 바다사자들이 부두에 모여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은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입니다. - 피어 41 & 43 1/2 (Piers 41 & 43 1/2): 더 많은 만 유람선
블루 앤 골드 플릿(Pier 41)과 레드 앤 화이트 플릿(Pier 43 1/2) 등 다양한 만 유람선들이 이곳에서 출발해 소살리토, 티뷰론, 에인절 아일랜드 등으로 향합니다. - 피어 45 (Pier 45): 살아있는 역사, 군함과 기계 박물관
피셔맨스 워프의 중심부에 위치한 피어 45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했던 잠수함 USS 팜파니토(USS Pampanito)와 리버티선 SS 제레마이어 오브라이언(SS Jeremiah O’Brien)이 정박해 있어 직접 올라가 내부를 탐험해 볼 수 있습니다. 동전을 넣고 작동하는 200여 개의 앤티크 게임기가 있는 뮈제 메카니크(Musée Mécanique)도 독특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2020년 화재로 일부 창고가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군함과 박물관은 피해를 면했습니다.) - 하이드 스트리트 피어 (Hyde Street Pier) & 뮤니시펄 피어 (Municipal Pier): 피셔맨스 워프의 끝자락
번호가 매겨진 피어들을 지나 피셔맨스 워프의 서쪽 끝으로 가면, 19세기 말의 범선과 증기 페리, 예인선 등을 볼 수 있는 하이드 스트리트 피어가 있습니다. 그 옆으로는 길게 만으로 뻗어 나간 뮤니시펄 피어가 금문교와 알카트라즈의 멋진 전망을 제공합니다.

페리 빌딩 남쪽, 짝수 번호 피어들의 오늘
페리 빌딩 남쪽, 짝수 번호가 매겨진 피어들은 대부분 여전히 산업용 부두로 사용되거나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피어 14 (Pier 14): 베이 브리지와 도시의 아름다운 전망
페리 빌딩 바로 남단에 위치한 피어 14는 만 안쪽으로 길게 뻗어 있어 베이 브리지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안타깝게도 2015년 케이트 스타인리 총격 사망 사건이 발생한 곳이기도 합니다.)
피어 24 (Pier 24): 사진 예술의 중심
베이 브리지 바로 아래 위치한 피어 24에는 사진 전문 갤러리가 자리해 수준 높은 전시를 선보입니다. (무료입장, 예약 필수)
피어 40 (Pier 40): 도심 속 카약 체험
시티 카약(City Kayak)이 위치해 있어 카약 렌탈, 강습, 가이드 투어 등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오라클 파크 옆 매코비 만에서 야구를 관람하거나 베이 브리지 아래를 탐험하는 특별한 경험도 가능합니다.
피어 70 (Pier 70):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개발 지구
과거 조선소였던 피어 70은 현재 주택, 공원, 그리고 역사적인 공장 건물을 복원하는 대규모 복합 개발이 진행 중입니다. IT 기업들의 사무실도 입주해 있죠.
Source: Fog City Secrets
도전과 미래: 변화하는 해안선
이처럼 매력적인 샌프란시스코의 부두들도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낡은 말뚝과 갑판, 창고 시설을 복원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며, 특히 진흙 위에 건설된 엠바카데로 방파제는 대규모 지진에 취약하고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침수 위험도 안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시는 수십억 달러를 투입해 방파제를 강화하고 해수면 상승에 대비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 중입니다. 익스플로라토리움이 낡은 피어 15를 성공적으로 복원하고 대중에게 개방한 것처럼, 앞으로 더 많은 피어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시민과 여행객들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피어들은 단순한 구조물을 넘어, 도시의 역사를 증언하고 현재를 담아내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살아있는 공간입니다. 안개 자욱한 ‘황금의 문’ 너머로 펼쳐진 이 도시의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각 피어에 얽힌 이야기들을 발견해 보세요. 숫자를 따라 걷는 이 바다 위 역사 산책로는 분명 여러분의 샌프란시스코 여행에 특별한 의미를 더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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