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의 상징, 금문교 아래 펼쳐진 푸른 만은 수천 년 동안 한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이 이 ‘황금의 문’을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는 올로니(Ohlone)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죠. 오늘, 우리는 시간의 안개를 헤치고 샌프란시스코 만의 오랜 주인, 올로니의 숨겨진 이야기를 만나보려 합니다.
1. 안개 속의 탐험, 엇갈린 발견과 마침내 드러난 ‘황금의 문’
1769년 늦가을, 스페인 탐험가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Gaspar de Portolà)가 이끄는 60여 명의 탐험대는 몬터레이 만을 찾아 나섰지만, 육로로 접근한 탓에 그만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샌프란시스코 만 남쪽, 지금의 퍼시피카(Pacifica) 지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거대한 내해(內海)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죠.
운명의 날은 11월 1일, 오르테가(Ortega) 병사가 이끄는 사냥꾼 무리가 탐험대의 야영지 서쪽 능선에 올랐을 때였습니다. 능선 너머로 펼쳐진 광활한 물줄기, 바로 샌프란시스코 만이었습니다! 사흘 뒤, 포르톨라 탐험대 본진도 마침내 이 거대한 ‘강어귀’를 목격하게 됩니다. 하지만 짙은 안개와 험준한 지형 탓이었을까요? 그들은 태평양과 만을 잇는 좁은 해협, 즉 오늘날 우리가 ‘골든 게이트’라 부르는 그 입구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황금의 문’이 스페인 탐험가들에게 그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770년대 초, 페드로 파헤스(Pedro Fages) 중위의 탐험대에 의해서였습니다. 이후 1776년 후안 바우티스타 데 안사(Juan Bautista de Anza)가 이곳에 요새(Presidio)와 두 개의 선교부(Mission)를 설립하면서, 샌프란시스코 만은 본격적인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발견’ 이전, 이곳에는 이미 수천 년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2. 첫 만남: 올로니, 평화로운 해안의 주인들
포르톨라 탐험대가 샌프란시스코 만 연안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올로니 사람들과 마주쳤습니다. 당시 올로니족은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몬터레이 만을 거쳐 살리나스 계곡 하류에 이르는 광활한 해안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일 부족이 아닌, 50개가 넘는 자치적인 부족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기 다른 방언을 사용했지만 서로 자유롭게 교류했습니다.

올로니 사람들은 수렵, 어업, 채집을 통해 풍요로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도토리는 그들의 주식이었고, 해안가에서는 조개와 물고기를, 내륙에서는 사슴과 토끼를 사냥했습니다. 정교한 바구니 세공 기술과 조개껍데기를 이용한 장신구는 그들의 뛰어난 손재주를 보여주었고, 춤과 노래, 이야기가 어우러진 의식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했습니다. 그들은 자연을 숭배하며, 땅과 바다가 베푸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포르톨라 탐험대는 올로니 사람들의 도움으로 식량과 길 안내를 받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경계심이 교차했지만,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만남은 곧 올로니 사람들에게 닥쳐올 거대한 변화의 서곡이기도 했습니다.
3. 수천 년의 숨결: 안개 이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올로니 사람들의 역사는 스페인 탐험가들이 도착하기 훨씬 이전, 약 8,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만의 변화무쌍한 기후와 다양한 생태계에 적응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해안가에는 조개무지 유적이 남아 그들의 오랜 생활 터전을 증명하고 있으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은 그들의 세계관과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자연과 깊이 교감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주기적으로 초지에 불을 놓아 원하는 식물의 성장을 돕고 사냥감을 유인하는 등,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자연을 관리했습니다. 마을은 물과 식량을 구하기 쉬운 곳에 자리 잡았고, 갈대로 엮은 둥근 형태의 집은 그들의 소박한 삶을 보여줍니다. 샌프란시스코 만은 그들에게 단순한 땅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영적인 공간이자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4. 만남과 변화: 선교, 갈등, 그리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
1776년 샌프란시스코에 미션 돌로레스(Mission Dolores)가 세워지면서 올로니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 선교사들은 올로니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유럽식 생활 방식을 강요했습니다. 전통적인 신앙과 언어는 억압당했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 선교부 주변에 강제 이주당했습니다.
낯선 환경과 고된 노동, 그리고 유럽인들이 가져온 질병은 올로니 사람들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한때 10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올로니 인구는 19세기 초에는 만 명 수준으로 급감했습니다. 일부는 선교부의 삶에 순응하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저항하거나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압도적인 무력과 조직력 앞에 무력했습니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선교부는 해체되었지만, 올로니 사람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선교부 토지는 멕시코인 지주들에게 넘어갔고, 올로니 사람들은 또다시 삶의 터전을 잃고 농장 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5. 오늘날의 올로니: 잊혀진 역사를 되찾기 위한 노력
골드러시 이후 캘리포니아가 미국에 편입되면서 올로니 사람들은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연방 정부로부터 부족으로 공식 인정받지 못하면서 그들의 땅과 권리는 더욱 위협받았습니다. 수 세기에 걸친 억압과 문화 말살 정책 속에서 많은 올로니 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들의 언어와 전통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올로니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올로니의 후손들은 샌프란시스코 만 주변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자신들의 잊혀진 역사와 문화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뮤웩마 올로니 부족(Muwekma Ohlone Tribe), 아메이 머츤 부족(Amah Mutsun Tribe) 등 여러 그룹들이 연방 정부의 부족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언어 복원 프로그램, 전통 공예 전수, 조상들의 성지 보호 운동 등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내 곳곳에는 올로니 부족의 역사를 기리는 기념물이나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올로니-포르톨라 유산 트레일(Ohlone-Portolà Heritage Trail)’ 프로젝트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알리려는 움직임도 활발합니다.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며 우리가 밟는 이 땅이 한때 올로니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요? 화려한 도시 풍경 너머,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한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과 문화유산이 숨 쉬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여행은 더욱 깊고 의미있는 경험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안개 자욱한 ‘황금의 문’을 처음 발견했던 탐험가들처럼, 우리도 올로니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 속에서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의 또 다른 얼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온 역사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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