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는 초기 이민이 미주 본토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샌프란시스코라는 이름은 1595년 스페인의 탐험가 세르메뇨를 수행한 1776년 프란체스코파에 의해 건설되고, 그가 ‘La Bahia de San Francisco’라 명명하였다. 1848년 금광이 발견된 이후 금문(金門)이라 불리며 골드러시를 이루는 바람에 인구가 급증했다.
1906년 대지진으로 도시전체가 파멸의 위기에 빠졌으나 한 은행가가 피해자들에게 조건 없이 복구비용을 무상 대부해 주는 바람에 도시 복구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약 9년 만에 다시 제자리를 찾은 샌프란시스코는 1936년 베이 브리지, 1937년 금문교를 완성하며 항만의 정비 등으로 크게 발전하여 항구를 중심으로 상공업의 중심지가 된다. 기온은 연간 8~18도 정도로 따뜻한 기후이고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다. 언덕과 안개가 많아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알려져 있다. 초기 이민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통해 첫 이민이 겪었던 일들을 알아본다.
샌프란시스코 지진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12분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초 간 발생한 8.3도의 강진은 엄청난 화재를 불러 3일간 전 시가를 불태우고 674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목조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수도 본관이 파괴되어 불길을 잡기가 어려웠는데, 이로 인해 이재민이 20여만 명 이상 발생했다.
생존자들은 몇 주 동안 천막이나 공원에서 잠을 잤다.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됐고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이민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지진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거나 본토로 오려고 계획했던 하와이 한인들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다행히 한인 피해자는 50여명이었으나 사망자는 없었다. 상항교회당이 피해를 입으면서 이곳에 거주하던 15명의 한인이 오갈 데가 없어지자 미 감리교회 구제부에서 이들을 위해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또 다른 40여명의 피해 한인들은 오클랜드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한 기록에 따르면 공립협회 회관과 대동보국회 건물, 예배당이 손실을 입고, 53명의 동포가 재난을 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때는 말이 끄는 불자동차가 와서 불을 껐는데 소방관이 부족하여 오클랜드와 알라메다 그리고 버클리에 있는 소방관들이 와서 도왔다. 지진이 난 후 많은 사람들이 새크라멘토로 이사를 갔다.
고국의 대한매일신보(227호)에는 일본 통감부가 샌프란시스코 일본 영사의 보고를 받아 “한인 사망자가 24명에 피해자가 80명 정도”라고 발표한 내용을 싣기도 했다. 이어 228호 신문에는 “한국 정부가 구휼금(구제금) 4천환을 일본영사관을 통해 동포들에게 배급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이런 소식을 뒤늦게 접한 공립협회는 피해상황이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일본 영사관을 통한 구제금은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확실히 하고, 자체적으로 일본영사에게 구휼금을 받은 동포를 조사했다. 그런 후 다음과 같은 통고문을 통해 일본정부의 미주한인사회 접근과 간섭을 거절하고 차단하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그 사본을 대한 매일신보사에 보냈다.
<통고문>
국내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에 기재되기를 한국정부가 상항 진재의 조난 동포들을 위하여 구휼금 4천환을 보내는데 일본영사로 하여금 분급한다고 하였다. 이번에 재난으로 인하여 회관이 소화되고 신문을 정간하는 경우에 처하였으며 동포들이 곤경에 있으나 왜적의 간섭을 거절하는 우리로서 일본영사가 분급하는 구휼금을 받지 않을 것이다.
재래에 일본영사가 우리의 일을 간섭하려고 여러 번 시험하다가 거절을 당한 까닭에 우리가 곤경에 빠진 때를 기회 삼아 구휼금으로 은혜를 베풀고 우리의 마음을 사려는 것이나 우리가 굶어서 죽을지언정 일본영사의 간섭은 받지 않아야 한다.
일찍이 하와이 동포와 함께 배일을 공결한 바 있고 그 신조를 지켜야 할 것이니 우리의 회관과 신문사 설비가 지체되고 동포의 곤란이 막심하더라도 일본영사를 경유하여서 주는 구휼금은 거절할 것이다.
1906년 6월 24일
북미 한인 공립협회 총회장 송석준
공립협회는 또 일본영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질문하기를 “상항 지진에 한인 사상자가 없는데 어찌하여 통감부에 거짓 보고를 하였으며 한인의 일을 어째서 간섭하는가?”하였다.
이에 일본영사는 지진에 관한 일반 정형은 일본 외무성에 보고하였으나 한인의 사정을 통감부에 보고한 일이 없다고 답했다.
이어서 그는 한인구제에 관하여는 5월 10일에 예배당 전도사 문경호에게 일화 5백 원과 백미 13부대와 간장 3통을 주고 한인들에게 분배하라고 했다고 밝히고 그러나 그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며 앞으로는 한인의 일을 간섭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공립협회는 심사회를 열고 전도사 문경호를 불러서 일본영사 구제에 대한 질문을 하였는데 처음에는 문경호가 사실을 부인하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Ellis St에 있는 집에서 교회를 하고 있던 문경호는 10일 동안 계속 질문을 받자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그런 내용의 구제품을 받은 것을 실토했다.
공립협회 관계자들이 구제품을 일본영사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문경호는 거절하게 된다. 이에 공립 협회 관계자들은 문경호를 ‘친일자이며 구제금 횡령 협잡자’라고 판정하였고 문경호는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한인의 곤궁한 때를 이용하여 배일 정신을 흐리게 하려던 일본영사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 소문이 국내에까지 알려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 영사를 통하여 보내려던 구제금 계획을 변경하게 된다.
광무 황제는 동포에게 보낼 구휼금 미화 1천9백 달러를 뉴욕 선교부의 브라운목사에게 보내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미국인 라클린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전달하게 했다. 공립협회에서는 이 돈으로 회관을 다시 짓는 한편 임시 사무실을 오클랜드 7가 1230번지에 설치했다. 또 대한매일신보사는 의연금 592달러 50센트를 거두어 전 상항 명예영사 빠스윅에게 보냈는데 이민국 의사 쭈루시가 그 위탁을 받아 한인들에게 분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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