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첫 노동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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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식 이민은 하와이 사탕수수밭을 경작하기 위한 노동 이민이었다. 당시 조선 왕조는 정치적 혼란으로 경제적인 탄압과 수탈이 팽배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농민들의 농지를 사들여, 백성들은 경지를 잃고 탐관오리의 부정부패에 시달렸다. 게다가 1901년 함경도 지역의 극심한 가뭄은 식량난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식량과 일거리를 찾아 멀리 시베리아나 만주, 또는 서울, 인천, 원산 등 대도시로 이주했다. 설상가상으로 1902년 여름에는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돌아 하루에 3~400명씩 죽어나갔다.

이에 고종황제는 1902년 돌아올 가을에도 흉작을 예상하고 7월 26일을 기해 쌀 수출 금지령을 내리고 급하지 않은 토목공사를 중지시켰다. 또한 중범죄수들을 석방하고 위생원으로 하여금 전염병을 잠재우는 데 총력을 기울이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한편 1830년대부터 집약적으로 사탕수수농업을 시작한 하와이에서는 외국의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해 1864년부터 정식으로 아시아 국가와 노동이민 계약을 맺었다. 외국인 관리를 위해 이민국을 정식으로 발족시키기도 했는데 1882년 노동자의 숫자를 보면 거의 50% 정도가 중국인이었다.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인 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1902년에는 일본인의 수가 전체의 73%나 이르게 됐다. 1900년에는 Organic Act라는 법이 제정되고 하와이 영토가 미국에 속하게 되어 행정체제가 바뀌었다. 하와이에 미국 법이 적용되는 것으로 하와이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노동이민이 미국 본토로 이주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기도 했다. 때마침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비옥한 농장지대를 대폭 개간하기 시작하였는데 많은 노동자들은 본토를 선망하며 너도나도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하와이는 노동력 부족 사태가 생겼고 일본계 노동자들은 그것을 빌미로 1900년에서 1905년 사이 34번이나 되는 동맹파업을 했다. 그러자 그들의 파업을 분쇄하고 견제할 필요를 느낀 하와이 사탕농장 경작협회는 한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주한미국공사 알렌에게 청해 조선의 임금 고종에게 해외 이민을 건의하도록 했다.

1884년 9월 22일 미국 북 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이 서울에 도착했다.

Horace Newton Allen 호레이스 알렌: 장로교회 의료선교사

그는 갑신정변으로 부상을 입었던 민영익을 치료한 공으로 황실 주치의가 되었던 사람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광혜원을 세우고 의술을 가르쳤다. 고종의 총애를 받아 그 후 주한미국 공사가 됐다.

한인들에게 미국이 문호를 여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그는 1901년 말 휴가차 미국으로 귀국했다. 돌아가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경작자 협회(HSPA)의 이사인 어윈을 만나 하와이의 노동력 부족사태를 알게 됐다. 그때 그는 한국인의 미주 이민 추진을 계획했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20만 정도였다.

고종과 친분이 두터웠던 알렌공사는 서울에 돌아와 고종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지금 백성들은 개국진취를 원하고 있을 뿐 아니라 흉년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하와이에 보내서 척식 사업과 신문화를 도입하는 것이 어진 정책”이라고 역설했다.

대한제국이 주위 강대국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미국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고종은 미국행 이민을 승인했다. 고종의 윤허를 받은 알렌은 미국으로 이런 보고서를 보냈다.

1902년 5월 9일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경작협회의 이름으로 한반도 곳곳에 미국으로 이민 갈 사람을 모집하는 공고가 붙기 시작했다.

하와이 이민농장 모집광고

노동자의 취업이민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이다. 데슐러라는 사람이 세운 ‘동서개발회사’가 실무를 담당했는데, 데슐러는 앨런의 정치적 발판이 되어준 친구였다. 앨런은 그에게 진 빚을 갚을 계기로 생각하고 노동을 주선하여 주었다. 대신 그는 농장 측에서 노동자 한 사람을 모집할 때마다 55달러를 받았다. 일본여자를 부인으로 두었던 그는 집이 일본에도 있었는데 배를 가지고 운송 사업을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가는 노동자를 먼저 일본까지 실어 나르는 일을 하면 그야말로 돈 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고 오랜 복종의 습성으로 다스리기 쉽다” 이민에 적극적이던 알렌은 하와이 주지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중국인이 대식가라서 식대가 많이 나간다는 농장 측의 비난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는 “한국인은 중국인보다 온순하며 한국인의 주식은 쌀이나 중국인보다 고기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는 또한 한국인 노동자들이 빈곤하고 정부에서도 여비를 조달할 의사가 없으니 미리 경비를 빌릴 수 있도록 요청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바람에 선박비 조차 없던 가난한 이들에게도 이민의 길이 대폭 넓어졌다.

전도금이라 불린 이 돈은 선박비와 식비 등 이민수송비로 150달러였다. 농장주들이 유럽에서 이민을 고용하는 것보다 동양인을 선호한 것은 유럽인은 1인당 150달러가 드는 데 비해 동양인은 70달러 정도로 비용이 대폭 절감됐기 때문이다. 고종은 해외 사정에 밝은 민영환을 이민담당 총재에 임명하고 1902년 8월 20일 해외개발공사 기능을 갖춘 ‘수민원’을 발족시켰다. 수민원을 궁내부에 설치하고 황성신문에 이민모집광고를 대대적으로 게재했다. 서울, 부산, 인천, 원산 등 대도시에 전국적으로 광고전단을 붙였다.

‘누구든 하와이로 가는 사람은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하와이는 기후가 좋고, 학교에서 학비를 받지 않으며,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고, 월급은 미국 돈으로 매달 15원(15불-약 67원 가량)씩 이고, 매일 10시간 일하며 일요일에는 휴식 한다. 집과 식수가 제공되며 병이 나면 치료비는 고용주가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조상이 묻힌 선산을 떠나는 것은 큰 죄로 알았고 가족과 고향산천을 떠나는 일이라 모두들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개항한 지 10년이 채 안 돼 열강의 상권 쟁탈전이 한창 일고 있던 제물포(지금의 인천)에서 용동교회(현 내리 감리교회)를 맡고 있던 선교사 존스 목사가 나서 적극적으로 교인들에게 이민을 권장했다. 덕분에 최초의 이민 지원자 121명 중 절반이 존스 목사(Pastor G.H.Jones)가 시무하던 교회 교인들이었다. 미주에 정착한 초기 이민은 교인이 많았으므로 미주한인사회는 당연히 훗날 교회 중심의 사회가 되었다.

남녀신도 50명과 제물포항 노동자 20명, 그리고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여러 직업을 가진 51명 등 총 121명의 최초의 이민이 민영환 명의로 발급된 대한민국 집조(여권)를 갖고 첫 이민선을 탔다.

이들 중에는 용동교회 교인들,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학생들, 시골선비, 군인, 농촌 머슴들, 막벌이 하던 역부, 건달도 끼어있었다. 그들의 교육정도는 65%가 문맹이었고 영어를 해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민을 결심한 그들의 동기는 대개 일본의 침략에서 오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피하고 경제적 궁핍함에서 벗어나 보려는 의도였다. 첫 이민을 실은 배는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를 떠나 일본 고오베에 도착해 그곳에서 미국입국에 적합한지를 가리는 신체검사를 받았다.

첫 하와이 한국 이민자들을 싣고 온 갤릭호(Gaelic)

20명이 탈락하여 나머지 101명만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남자 56명에 여자 22명, 그리고 아이들이 23명이었다. 이 중에 다시 8명은 눈에 이상이 있다고 해서 입국하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기막힌 일을 당했다. 그리하여 첫 번째 이민 배였던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들어온 한인 숫자는 93명이었다. 1903년부터 1905년 사이 남자 6,048명, 여자는 637명 그리고 어린이 541명이 들어왔는데, 퐁 7226명이 15번의 항로를 거쳐 미국에 들어왔다. 멀미 등 갖은 고생을 하며 한 달여 먼 뱃길을 달려왔지만 479명은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먼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 전에 샌프란시스코에는 온 소수의 인삼상인 및 유학생 등이 있었으나, 대한제국이 수민원이라는 이민 담당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을 이민의 효시로 보고 있다. 언젠가는 조국으로 금의환향을 꿈꾸며 희망을 가지고 낯선 섬에 정착한 그들이 바로 미주지역 이민의 첫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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