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독립운동사:3월1일

비폭력 무저항의 평화적 시위, 3.1 운동

일제는 독립의 기대에 어긋나는 서명운동을 벌렸다. 고종은 이때 용감하게 일제의 서명운동을 거부해 국민의 존경과 애정을 받게 됐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1919년 1월 20일 숨을 거두었다. 뇌일혈이라 일제는 사인을 밝혔지만 혈압이 정상이었던 터라 두 가지 소문이 전국을 휩쓸었다. 하나는 그가 독살되었다는 것이고 하나는 총애하던 아들 영친왕이 일본여자 마사꼬와의 결혼식이 다가오자 비관하여 자살하였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고종의 사망을 이틀이나 숨겨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의구심에 불을 지폈고 애도기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지못해 3월 3일 지역별로 추도식을 갖게 했다. 추도행사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기 위한 계획이 논의되었다.

3.1운동은 종교인들이 주도하였는데 개신교를 이끌던 길선주 목사와 한국 개신교 지도자 이상재, 천도교의 손병희, 불교의 한용운이 주동이 됐다. 일제는 추도일인 3월 3일에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는데, 민족대표 33인은 일제의 허를 찔러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만세시위를 주도했고 독립선언문을 채택했다. 그것은 비폭력 무저항의 평화적 시위였다.

미주한인들은 현순의 전보가 3월 9일 샌프란시스코에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에게 전달되어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3백만 명 조선독립단은 3천 명의 예수교인, 5천 명의 천도교인, 그리고 각대, 중학교 학생들 및 각 단체로써 조직한 기관이다. 독립단은 3월 1일 하오 1시에 서울, 평양과 기타 각 도시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하였음. 대표자는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임. 이승만 박사는 어디 있습니까? 상해 특별대표 현순”

안창호는 3월 13일 3.1운동 이후 미주한인들이 취할 방향을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개개인의 독립의 각오와 일치된 행동을 가질 것, 둘째, 미국 각 언론 잡지나 종교계에 3.1운동소식과 기독교 박해사실 등 한국사정을 미국인들에게 알려 그들의 동정을 얻고 한인활동에 많은 도움을 얻도록 할 것, 셋째,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동포들의 재정공급의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미주 한인들은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는 기쁨으로 3.1운동으로 하나가 되어 너나없이 더욱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자금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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