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우드시의 항공학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20마일쯤 남쪽에 위치한 레드우드 시에 있던 항공학교다. 1916년 크리스토 펄슨이 시작한 비행학교로 그는 학교를 시작한 지 4달 만에 28살의 나이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 학교엔 미국인 및 외국태생의 학생이 28명 재학하고 있었다.
설립자 사망으로 생긴 갑작스런 공백은 1917년 11월 당시 교관이었던 해피 브라이언트가 학교를 인수하면서 해결되었다. 학교 소유자가 된 교관 브라이언트는 누구보다도 많은 학생을 가르쳤다.
이 학교에는 1919년에 한장호와 9명의 한인들이 다니면서 비행기술을 배웠다. 그들은 일 년 안에 자격증을 받았다. 후일 브라이언트와 한장호는 윌로우스에 설립된 한인 비행학교에 교관으로 초빙된다.
미국정부 기밀문서에는 1915년 10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 학생으로 도착한 한국 사람이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6개월간 비행교육을 받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말과 중국말도 한다는 이 사람은 외아들로 10살에 아버지를 잃고 평양에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고 했으며 1922-23년 시카고 YMCA 학교를 다녔다고 되어있다.
1942년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미국 중앙정보국 CIA의 전신) 멤버가 되었다는 그의 이름은 서류에 이니셜 B로만 써 놓았는데 노백린이 아닌가 짐작된다.
상해임시정부 비행대 편성 문제와 양성소
1920년대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비행대 편성문제가 활발히 대두됐다. 1920년 1월과 2월에 비행기 구입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임시정부 관계자는 상해의 영자신문 ‘대륙보’기자 에벤츠에게 비행기 종류 및 구입절차에 대해 문의했다. 2월 2일부터 19일까지는 거의 매일같이 미국인 비행기 조종사 에드먼과 구체적인 협의를 가졌다. 그 때 구입하려 했던 비행기는 직접 독립전쟁에 전투용으로 사용하려 했던 것이 아니고, 국내에 선전문 살포, 각처에 있던 독립군 단체 혹은 각 처의 동포사회와 연락을 신속히 하는 임무를 수행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미국인 에드먼을 통해 조사한 결과 당시 임시정부로서 구할 수 있는 기종으로는 150마일 밖에 비행할 수 없다는 것이며, 자금문제도 여의치 않아 좌절됐다. 상해에서 비행대를 편성하려던 문제는 미주에서 비행사 양성소 설치문제와 동시에 추진되고 있었다. 비록 비행대 편성계획은 무산됐으나 미주의 비행사 양성소는 일단 뜻을 이루게 되었다.
Willows(윌로우스) 비행학교
상해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주에 체류하던 때에 캘리포니아에서 6개월간 비행술을 배웠다. 그는 미국에 와서 곽림대를 만나 공군창설을 논의한 후, 1920년 2월 20일에 북가주 윌로우스 지방에 군단과 비행학교를 설립했다.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한 비행학교는 총재 김종림이 낸 2만 달러의 자금과 비행장으로 사용할 40에이커의 운동장을 기부 받아서 시작됐다. 매달 3천 달러의 예산도 김종림으로부터 받아 교사의 월급과 운영금으로 사용했다. 교육국에서 임대한 퀸스 디스트릭트 학교건물에서 교련, 전술, 비행술, 비행기수리와 관리, 무선전신학, 영어등을 가르쳤는데 월사금은 10불이었다. 1920년 6월 22일 김종림이 구입한 비행기가 도착하여 비행술 실습이 시작됐다. 이틀 뒤인 6월 24일에도 레드우드시로부터 비행기가 도착하여 9월에는 무선통신을 갖춘 5대의 비행기를 갖게 됐다.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 1920년 6월 24일자에 의하면 교관은 레드우드 비행학교교관이었던 브라이언트였는데 학생은 30명이었다고 한다. 미국인 교관 프시안을 월봉 5백 달러에 초빙했고 한국인 비행사 6인을 초빙했는데 미국에 망명하여 레드우드시 비행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한장호도 있었다.
총재에는 김종림, 총무 노백린, 서기 강영문, 재무 이재수와 신광희, 감독은 곽림대였다. 9명의 간사와 교관은 레드우드 비행학교교관이었던 브라이언트였으며 한국인 교관은 이용선, 오임하, 이초, 노정민, 박낙선, 우병옥이었다. 학생은 최영길, 김태선, 박유대, 조기호, 최능익, 박대일, 신영철, 조종익, 정이용, 정홍성, 김몽용, 홍종만, 조진환, 신형근, 임상희, 이영기, 김전, 손이도, 박희승 등이었다.
이동녕, 이동휘, 김구, 이시영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국무총장(국방부 장관) 노백린이 임지에는 부임하지 않은 채, 미국에서 조국을 위해 비행사를 양성하고 양성된 비행사로 하여금 공중전을 펼치게 한다는 것을 듣고, 이를 정책으로 채택하였다. 연습용 비행기의 값은 대 당 2천 달러씩이었다. 새로 구입된 비행기에 선명한 태극마크를 그려 넣고 K.A.C(Korean Aviation Corp-한인비행가구락부) 글자를 넣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노백린장군은 1920년 3월 1일 한국의 3.1운동 1주년에 400여명의 한국인이 북부 캘리포니아 여러 지방으로부터 새크라멘토로 모일 때 이 행사를 축하하러 왔다.
1920년 독립신문에는 ‘한인의 손으로 최초의 비행’이란 제목 하에 3월 1일 각처에서 축하식이 거행될 때 비행학교 수업 중이던 학생 이용선과 이초 양군이 비행기를 조정 하여 식에 참여하려 비행하였는데 공교롭게도 큰비가 내려 행렬에는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계속 비행시간이 이용선군은 3시간 20분, 이초군은 2시간이다. 한국인의 손으로 조종한 비행기가 천공을 날음이 이것이 처음이라고 하리로다”
라고 보도됐다.
1920년 3.1기념식에 참석한 학생 중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지원한 최능익은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1920년 6월 30일부터 7월 8일까지 샌프란시스코 북미한국국민총회에서는 비행학교 보조금 지출을 위해 그해부터 회원 각자의 1년 분 수입의 5%를 소득세로 납부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사회에 비행학교에 대한 관심과 기부가 더 고조되자 국민회에서는 애국심이 줄어들까 걱정을 할 정도였다. 상해의 독립신문은 4월과 5월에 비행학교에 대한 기사를 많이 다루었고 윌로우스의 영자신문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도 이 비행학교에 대하여 여러 번 보도했다.
1920년 7월 5일 성대한 개소식이 200명의 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첫 비행학교 졸업을 했던 우병옥, 오임하, 이용선, 이초 등 4명의 졸업과 동시에 윌로우스 비행학교 교관이 되었다. 그날 노백린과 김종림이 비행기에 의한 독립전을 연설했고 교관 브라이언트와 오림하가 축하비행을 했다. 당시 연습생은 25명으로 학비는 자비 부담으로 150달러였다. 그러나 1921년 4월 10일 미국정부의 항공자격증을 받기 위한 비행시험에서 박희성(3.1 독립선언 33인 중 한 분인 박희도의 동생)이 추락하여 비행기는 대파되고 박희성은 중상을 입어 김종림은 이를 뒷바라지할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학교의 졸업생 박희승과 김자중, 이용근은 국제 비행사가 되었고 김자중은 동삼성 장작리의 항공대에서 활약했다. 박희승과 이용근은 1921년 7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육군 비행병 소위에 임관되기도 했다. 이 학교 출신 중에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공군에 자원 참전한 용사도 있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영화로 촬영되어 미국 전역에서 유명해져 미국인이 이 학교에 지원하기도 했다.
이초는 1944-1945년 미국의 OSS대원으로 유일한과 함께 한반도 침투작전에 참가해 무공을 세웠다.
이 학교는 김종림과 북미한국국민총회에서 지원을 받았는데 이승만이 중국으로 갈 때 노백린 장군도 함께 가느라 군단을 떠났다. 그 후 곽림대가 맡았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쌀값 폭락과 흉작으로 ‘쌀의 왕’ 김종림으로 부터 지원금이 끊기고 자 재정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폐쇄됐다. 도산 안창호는 비행기에 관련하여 대단한 의지와 집념을 보였는데 같은 서북계 인사인 계원 노백림과 수시로 의논하였다고 보며, 도산의 항공을 통한 독립사상과 실천집념은 계원에게 상당부분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 진다. 또한 총재 김종림이 흥사단 창립위원이고 나머지 주요 인물들도 흥사단 단원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한민보는 “장쾌하고 신기하여도 이렇게 신기한 일은 진실로 무엇에 비할 데 없으니 기쁨에 겨운 우리는 눈물을 뿌렸노라.”고 미주한인들의 감격을 그렸다.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에 보도된 한인비행학교
◈ 1919. 2. 19: 한국 사람들 항공분야에 진출하다
총책임자로 벼농사를 짓는 부유한 김이라는 사람이 퀸트 하우스에 세 들어 40에이커의 땅을 사고 교사를 고용하여 15명의 학생이 3대의 비행기로 교육을 시작했다.
◈ 1919. 2. 19: 한인 비행학교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여러분들, 그리고 14 카운티 관계자들에게 알린다. 윌로우스시에 있는 한인 비행학교는 젊은이들을 훌륭한 미국인으로 교육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비행학교와 날아다니는 비행기는 캘리포니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글랜카운티 윌로우스시 변두리에 있는 이 한인 비행학교는 한인들이 비행술과 비행수리 등 비행기 다루는 법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버나드 회장과 14카운티 관계자들은 달갑지 않은 외국인들이 미국을 위협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인들은 단순히 평화와 미국인들에게 즐거움 주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의 집과 농토는 한인들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만일 주지사 스테판스가 계속 우리들의 주장을 무시한다면 그는 곧 ‘평화적 투쟁’에서 ‘강제적 투쟁’으로 우리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버나드 회장은 말했다. 비행학교를 위해 40에이커의 부지를 이미 사두었고 몇 대의 비행기가 한인에 의해 이미 움직이고 있다. 일본사람들은 법에 의해 가주에 있는 땅을 살수가 없다. 실제적으로 그들이 땅주인이 되려면 백년에서 2백년 세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주민들은 이들에게 혜택을 주어 동양인은 삼 년이면 땅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 1920. 3. 1: 한인들이 일본과 싸우기 위해 비행사를 양성하다. 새크라멘토에 온 노백린 대령은 인터뷰에서 “학교의 목적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는 것이고 그들은 어느 때인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되찾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기 위하여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1920. 6. 22: 한인 비행학교 비행기 오늘 도착하다.
한인 비행사들은 기술을 습득하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항공학교를 설립할 것이라고 한다.
◈ 1920. 6. 24: 한인 비행학교에 2번째 비행기 오늘 도착하다
교관 겸 비행사 브라이언트는 다른 비행기가 오늘 레드우드시티로부터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먼저 와있던 비행기로 이미 학생들은 교습을 받고 있다. 브라이언트는 Young S. Lee, Peter Ohu 그리고 Charles Lee 세 한인과 함께 일하고 있다.
◈ 1920. 9. 4: 한인 비행학교 영화에 나오다
한편 신한민보는 1920년 5월 25일자에서 한인비행학교와 관련, ‘세상에 참혹한 것은 일본’이라는 제목 하에 훗날의 일본 모습을 이렇게 보도했다. “만일 비행기가 습격하면 일본은 아무 방어책이 없다. 일본은 나무로 지은 집이라 화재가 나기 쉽고 땅속 방(베이스먼트)이 없은즉 숨을 곳이 없다. 만일 비행기가 동경을 습격하면 비행기 10척만 가지고 소화탄을 떨어뜨리면 7,8분 동안에 동경 전부를 소화할 수 있으니 일본의 가옥이 중국과 조선보다 소화하기 쉽게 되어서이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