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독립운동사:미주 한인의 독립운동 그리고 군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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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
미주의 한인사회는 자치적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을 목표로 1909년 2월 강력한 조직체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러일전쟁 기간 중 ‘주한조선군’이라 칭하던 일본군은 본국에 들어와 재정궁핍을 구실로 한국군대를 해산했다. 1904년 1차로 한국 군인을 반감시킬 때 해산된 군인 중 3백 명 가량은 하와이로 와서 한인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약 2백 명은 샌프란시스코와 캘리포니아 각지와 네브라스카 및 콜로라도 주에 이르는 미주본토에 흩어져 그곳에서 또한 한인사회의 구성원이 됐다. 광무군으로 불리던 이들은 한일합방 후 조국을 지키지 못한 한을 절감하고 대한인국민회에서 추진하던 군사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여가가 나면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09년 6월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에서는 독립전쟁을 위해 한인소년병학교(Military School for Korean Youth)가 설립되어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이곳에서는 재미유학생 및 한인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하계학교가 운영되기도 했다. 한인사회에서는 소년병학교 유지단까지 결성하여 후원했다.

1910년 10월부터는 대한인국민회가 경영하던 로스앤젤레스 동북지방에 위치한 클레어몬트 학생양성소에는 ‘군사훈련반’이 조직되어 매주 3일씩 저녁에 훈련을 했다. 롬폭지방에서는 ‘의용훈련대’를 조직하여 매일 저녁 훈련했다. 11월에는 캔사스시에 ‘소년병학원’이 설치되었고 12월에는 와이오밍 슈페리오에 ‘청년병 학원’을 설립되어 매일 저녁 훈련이 실시됐다.

한인사회 규모가 큰 하와이에서도 대동공진단이 주동이 되어 각 지방의 농장에서 광무군을 중심으로 군사훈련이 실시됐다. ‘산넘어 병학교’라고 불리던 ‘대조선국민군단’이 편성되고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가 설치되어 국민군단의 사관양성을 본격화하였다. 사관학교 학생은 3백여 명에 달했다. 국민군은 원동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과 이동휘를 중심으로 편성됐던 ‘대한광복군정부’의 광복군과 맥이 통하였던 군대였다.

<국민군가>

오 우리 국민군 소년자제/건강한 아이들 다 나와/

한 목소리로 국민군가 부르세/

부르세 국민군 군가/지르세 우리 목소리/

잠든 자 깨고 죽은자 일도록/우리 국민군가 높이 부르세.

이처럼 미주의 전역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군사력 배양을 목표로 수많은 학교가 설립되어 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무장독립노선은 지도자들 간의 노선 차이, 전투 현장과의 거리감, 재정적 고갈 등으로 하나 둘씩 쇠고 만다.

1945년 4월 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50개국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전후의 세계평화와 안전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임시정부는 샌프란시스코회의에 한국대표를 참가시키려고 하였으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교노선 부진을 만회하려면 군사계획과 실천밖에는 없다고 보고 더욱 적극적으로 군인을 양성하기로 한다. 그러나 곧 조국에 광복이 찾아왔다. 임시정부는 해외에 선지 27년 만인 1945년 11월 조국의 재건이라는 새로운 사명을 띠고 서울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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