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독립운동사-세발의 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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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 페리항에서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한 사건은 한민족의 자유정신과 항일 의식을 만천하에 떨치는 계기가 됐다. 또 미주 한인사회에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미주 한인들은 이 사건을 일본의 한국침략을 미 주류사회와 세계에 알리는 호기로 삼았다. 당시 산만하다 싶었던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이 사건이 자극이 되어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두 의사의 생명을 건 애국적 행동이 모체가 되어 미주 내 산재해 있던 단체들은 1909년 2월 1일 ‘국민회’라는 하나의 항일독립운동 단체를 탄생시킨다.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 두 한인은, 사건에 있어서는 피고였으나 큰 의미로는 한국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를 세계 자유인의 법정자리 피고석에 앉힌 격이었다.

이 사건은 한인 개인들의 의식에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모든 힘을 조국의 자주독립운동에 모으게 했고 국내외에서의 구체적인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방법들이 강구되기 시작했다. 백년이 되어서야 조명 받기 시작한 이 사건은 아직도 연구해야 할 부분이 매우 많은 중요한 사건이다. 두 사람의 거사는 자기의 목숨을 내건 나라 구하기 일념에서 나온 민족적 투쟁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세 발의 총성을 신호탄으로 일어난 이 일은 한국역사와 미주 이민역사에 민족의식의 강화, 민족주의 사상 정립, 자주성 회복운동을 되짚어 보게 한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됐다.

사건의 발단

스티븐스는 미국인으로 일본주재 미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일본 동경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본정부가 한국 합병을 앞둔 1904년 8월 스티븐스를 한국으로 파견되어 고종황제의 외교 고문을 맡게 된다. 그는 친일파였다. 이등박문을 비롯한 일본의 여러 고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을 합방하기 전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미국정부의 이해를 얻고 미국의 여론을 친일적으로 이끄는데 스티븐스를 활용하기로 했다. 스티븐스는 명분상 휴가를 보내기 위해 미국에 온다고 발표했다. 스티븐스 일본의 통감부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고 친일행적을 계속했다는 일설도 있었다.

그가 얼마나 친일적이었던지 한국인들 사이에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일본관리보다 더 충복’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 중에서도 국제 정세와 일본의 야욕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던 헐버트, 벳셀, 맥컨 같은 이들은 책, 월간지, 신문 기고 등을 통해 일본의 한국에서의 만행을 비판하고 있었다.

1908년 3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와 기자회견을 갖는다. 그는 “한국은 사실상 일본정권 아래 이득을 얻고 있으며 결국은 미국도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망언을 했다. 이어서 “첫째,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아 양국관계가 점차 친밀해지고 있으며, 둘째, 한국 사람들은 글을 모르고 미개하여 자주정권을 가질 수 없으며, 일본이 한국인민을 다스리는 법은 미국이 필리핀 인민을 다스리는 방법과 같다. 셋째, 한국이 만일 일본정권아래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러시아 지배하에 있었을 것이며 한국 신정부가 조직된 이후 정계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 일본을 반대하지만 농민과 일반백성은 종전의 한국 정부가 일삼았던 학대를 받지 않게 되었으므로 일본인을 환영하고 있다. 넷째, 일본은 전보다 나아지는 생활에 기뻐하고 즐기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스티븐스가 타고 온 배가 도착한 날, 또 다른 배 한 척에는 한국에서 항일인사들이 스티븐스의 미국방문에 즈음해 보낸 격문이 있었다. ‘고 재 상항 동포’라고 되어있는 이 편지는 스티븐스가 한국에서의 외교행각이 얼마나 친일적이었는지를 규탄하는 내용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지역 동포들의 궐기를 촉구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노동자 배척운동이 일어나 이와 관련한 법안이 제안되어 12월 열릴 예정인 미 의회는 이 법안을 다루도록 되어있었다. 일본은 미국을 방문하는 스티븐스로 하여금 미 의회 의원들 및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접촉케 하여 법안통과를 무산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교포들의 반응

스티븐스의 기자회견 내용이 크로니클 지 전면에 크게 보도되자 교포신문 국민보는 이 내용을 받아 토요일 자에 실었다. 이 기사를 읽은 한인들의 분노는 이루 형언키 어려운 정도였다. 다음날인 일요일 상항한인감리교회에 모인 한인들은 앞 다투어 스티븐스를 규탄하며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동요했다. 3월 22일 오후8시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공동주최로 연합 임시총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선우탄의 증언에 의하면 총회가 열린 공립회관에는 5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당시 상항에서 약 150명 정도의 한인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회를 맡은 양주삼 목사가 “스티븐스는 우리의 주권을 무시하고 민족을 무시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토론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젊은 학생이었던 전명운은 “원통한 노릇입니다. 나라가 약하니까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요. 우리는 행동으로 처리해야지요. 그 놈을 죽여야 해요”하고 흥분된 발언을 했다. 또 다른 여러 사람들이 스티븐스를 규탄하는 발언을 했다. 참석자들은 스티븐스가 그런 망언을 일삼았는데도 한인사회에서 아무런 행동이 없다면 미 주류사회에서 우리 민족을 무엇으로 보겠느냐며 구체적인 대책을 강구할 것을 요청했다.

토론 끝에 4명의 대표가 선출됐다. 대동보국회 대표로 이학현과 문양목, 공립협회 대표로 최유섭(최정익과 동명이인)과 정재관이 선출됐다. 이들 대표 4명은 즉시 스티븐스가 투숙하고 있는 페어몬트 호텔로 찾아갔다. 호텔직원으로부터 동양인들이 찾는다는 말을 들은 스티븐스는 일본친구들이 찾아 온 줄로 알고 호텔 로비에 내려 왔다가 한인대표들을 보자 얼굴색이 변했다.

대표단은 “신문에 나온 내용을 인정하느냐”고 추궁하고 “잘못된 내용이니 정정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스티븐스는 “한국에 이완용 같은 충신이 있고 이등박문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오 동양에 큰 대행이라, 한국 사람들은 이등박문의 총책을 환영하고 있다. 이등박문은 아시아의 위대한 정치가이다. 그는 한국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한국은 다행이다. 한국의 고종황제는 능력이 없고 한국 관리는 부패했다. 한국국민은 미개한 백성이다. 그들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국민이다. 일본의 보호가 아니었으면 아마 러시아가 한국을 점령했을 것이다. 당신들은 일본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망언을 반복하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또 그는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며 내가 신문에 말한 것은 사실과 다름이 없으니 다시 고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재관과 최유섭은 “이런 개자식 같은 놈은 죽여 버려야 한다”, 문양목도 “버릇없는 놈은 때려 죽여라”라고 분을 냈다. 정재관이 주먹으로 스티븐스의 턱을 치자 스티븐스는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넘어졌다. 이에 네 명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내려치자 스티븐스의 얼굴에는 피가 흘렀다. 스티븐스가 비명을 외치자 호텔 종업원과 손님 여러 명이 달려왔다. 그러나 한인대표 4명은 오히려 당당하게 말리는 이들에게 스티븐스의 행적과 일본의 포악한 만행을 호소했다. 당시는 동양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아 백인이 동양인을 죽여도 관대해 법정에서 재판은 고사하고 신고도 되지 않을 때였다. 와이오밍 주에서 중국사람 20여 명이 무더기로 학살을 당했으나 정부에서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었다. 이런 동양인들이 샌프란시스코 최고급 호텔의 로비에서 백인 외교관을 구타했다는 사실은, 현장에 모여든 백인들과 경찰관을 놀라게 했다. 영어가 유창한 이학현이 말했다. “이 사람은 일본정부의 앞잡이, 친일파다. 일본의 스파이이고 배신자다. 이런 미국인은 미국에 수치다.”

너무도 당당한 한인 4명의 태도에 모여든 사람들은 말을 잃었고 곧이어 도착한 고이께 영사는 그들의 체포를 강경하게 스티븐스에게 권했다. 그러나 자신의 체면과 외교상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 스티븐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출동한 경찰관들도 스티븐스의 태도에 따를 수밖에 없어 한인들을 어쩌지 못한 채 로비에서 나가라고 손짓할 뿐이었다.

후에 이 사건을 안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지 신문기자가 이들 대표들을 찾아 왜 스티븐스를 쳤는가를 물었다. 이학현은 “우리에게는 자유냐 죽음이냐 하는 문제였다.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책임질 것이다. 우리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다. 경관이 체포한다 해도 무섭지 않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서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양목은 “우리는 한국의 애국자들이다. 당신들의 역사를 보라. 미국의 애국자는 영국을 반대했다. 한국의 애국자는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한다. 일본제국주의를 지원하여 한국백성을 압제하는 국가나 개인은 우리의 원수다. 스티븐스는 우리의 원수다. 당신들이 미국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는 한국을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스티븐스를 구타한 네 명의 한인대표들은 그 길로 공립회관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한인들에게 스티븐스의 계속된 망언, 그리고 호텔에서 벌어졌던 일을 보고했다. 흥분한 한인들은 다시 대책을 토론했다. 그때 전명운(당시 25세․공립협회원)이 “내가 처치 하겠다”고 나섰고 허승원, 신영구, 리몽규 등 격렬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자리가 없어 벽에 기대섰던 장인환(당시 32세․대동보국회 회원)이 “누가 총만 주면 그를 쏘아 응징하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평소 조용하고 남을 비난하는 일이 없던 장인환이었다.

네 명의 한인대표들은 그날 밤 잠을 잤을 리가 없고 작전계획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본말을 잘하는 사람을 내세워 일본영사관에 전화를 해서 스티븐스의 일정을 알아냈다. 전날 일로 불안해진 스티븐스는 일정을 앞당겼다. 구타사건이 있던 다음날인 23일(월요일) 떠나기로 했다. 오클랜드에서 동부로 출발하는 기차를 타려면 샌프란시스코 페리항(부두)에서 배로 오클랜드를 가야했다. 당시는 동양인이 총을 소지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지만, 장인환은 총을 품고 부두로 나갔고, 전명운도 총을 준비하고 부두에서 스티븐스를 기다렸다.

거사

스티븐스는 호텔에서 한인들에게 구타당한 뒤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는 일정을 앞당겼을 뿐 아니라 호텔을 떠나면서 일본총영사에게 “내가 혹시 죽으면 통감 이등박문과 일본외무대신에게 전해달라”며 유서 두통을 전달했다. 유서에는 자신이 죽으면 그 보상금을 두 여동생에게 주라는 내용과 자신은 일본을 위해 22년간 일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1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 정거장에 도착한 스티븐스가 일본총영사 소지 고이께의 전송을 받으며 자동차에서 내리자 전명운은 총을 뽑아 그를 쏘았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전명운은 권총을 거꾸로 쥐고 스티븐스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즉시 반격에 나서 범인을 잡으려는 거구의 스티븐스와 전명운 사이에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때 돌연히 나타난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겨눴다. 장인환은 권총 세 발을 쏘았는데 그 중 첫발은 스티븐스와 전명운이 뒤엉켜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바람에 아깝게도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다. 스티븐스를 향해 다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스티븐스는 등과 허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찰은 그 자리에서 장인환을 체포했다. 부상당한 전명운과 스티븐스는 근처 하버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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