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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운의 진술
입원중인 전명운은 자신을 만나러온 기자들에게 스티븐스는 한국에 대해 거짓말을 하러 온 사람이고 일본인들은 한국의 부와 나라를 도적질하고 있다고 서두에 밝히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나는 25세다. 학생으로서 미국에 유학하러 왔지만 돈이 없어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돌아 온 것은 5일전이나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세계 각국은 우리나라를 소등국이라고 한다. 나는 늘 이것을 슬퍼해 왔다. 나는 배움으로 나라를 구하려고 고국을 떠났다. 그러나 내가 고국을 떠난 후 형편은 더 나빠져 일본은 각종 조약을 체결하려고 우리나라를 압박하였다. 나의 형제와 친척 중에 왜놈에게 죽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를 호소할 아무런 힘도 없다. 며칠 전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한국 사람이 왜놈을 환영한다는 말을 했고 이 점에 관해 미국인들을 설득하려 한다고 해 나는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고 그의 초상을 신문에서 얻어 호주머니에 넣고 역으로 갔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저격하려 하였으나 내 총의 탄 차가 돌지 않았다. 그래서 권총으로 그를 쳐서 가능하면 두 눈을 못 쓰게 만들려고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가 나를 치는 판이 되어서 나는 도망하였다. 스티븐스는 뒤에서 나를 쏘았다. 나는 혼자였고 누구에게도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일본을 위해 더 충실할 것이다. 나는 누구와 사전에 모의 한 일이 없다. 나는 이제 죽기를 바랄 뿐이다.”
그의 발언은 미국 내 주요 신문에 보도됐다. 이를 본 한인들은 물론 미국인들까지 그의 애국심에 탄복하였다. 또한 그가 동포들에게“나는 미국의 살인법을 범하였으니 다시 살기를 바라지 않거니와 동포 동포여 나라 사랑 나라 사랑”이라며 글을 썼는데 곧 전씨 애국가라고도 한다.
스티븐스의 진술과 사망
스티븐스는 경찰의 심문에 “내 나이는 55세, 주소는 한국 경성이다. 한국내각의 원문으로 사무소는 한국궁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사건 정황에 대해 “간밤에 수명의 한국인이 페어몬트 호텔로 찾아와 나를 습격하였다. 그들은 나를 의자로 내려쳐서 오른편에 입은 상처는 그때 입은 것이다. 오늘 아침 차에서 내릴 때 한사람은 앞쪽으로 달려와 내 얼굴을 세차게 쳤다 그때 나는 이 자(병상에 누워있는 전명운을 가리키며)를 쫓아 따랐는데 그때 이자(장인환을 가리키며)가 나를 쏘았다. 그는 두 번 나를 쏘았다. 누군가가 그의 손으로부터 단총을 빼앗은 자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는 동안에 군중이 모여 와서 사건에 관계하였다. 지금의 상태로는 나의 병세는 생사가 반반이다. 나는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후순간까지 일본의 한국 강점이 정당하다고 주장했고 한국국민을 모욕했다. 또 그는 “나를 해치고자 한 행동은 신중성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한국보호를 반대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한일관계에 아무 영향을 줄 수 없다. 오래 기다린 휴가를 이처럼 시작하게 된 것은 유감이다”(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1908년 3월 24일자)고 말했다. 스티븐스는 25일 오후 급격히 상처가 악화되어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병원에서 오후 11시10분 사망했다.
한인들의 애국정신
한인사회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한 미국인들의 보복이 있을지 모르고 일본당국의 악선전 등으로 불안해했다. 이런 공포 분위기가 감돌자 처음에 한인들은 아이들을 밖에 내보내는 것을 피했고 혼자 외출하는 것도 삼갔다. 그러면서도 용감한 두 애국자를 구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누구에게나 있었다. 두 애국자 구명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퍼지자 움츠렸던 한인사회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또 술, 담배, 도박 등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세월을 탓하던 사람들이 자극을 받아 애국운동에 매진하는 현상도 일어났다.
한인사회는 장인환, 전명운 두 사람의 미 법정 재판을 앞에 두고“우리가 억울한 사정을 세계에 발표할 기회가 없어 항상 개탄이더니 오늘 양씨의 충의로 소개하여 반일동안에 각처 호외신문과 세계전보가 사람의 이목을 경동케 하였으니 만일 양씨의 의혈이 아니면 우리의 원통한 마음을 세계만국에 공포하였을까? 이 재판은 세계의 공개 재판이오 우리의 독립 재판이니 우리가 이 재판을 이겨야 우리 2천만의 독립이 될 것이다”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게 된다.
스티븐스가 저격된 날 하오 9시 30분,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의 40여 명이 제2차 한인공동회의를 개최하여 의사의 사후 대책을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는 이 두 사람을 돕기 위한 의연금 700여 달러가 각출됐다. 재판에 대비하여 최유섭, 문양목, 백일규, 정재관 등 7명의 ‘판사전담위원회’가 구성되고 재무는 문양목과 김영일 양씨가 임명됐다. 신한민보 등 한인 신문은 이 사건과 관련한 기사를 계속 보도하며 항일기개를 높이고 여론을 환기시켰다.
3명의 유명한 변호사를 선정되고 두 의사의 행동은 애국지사의 의거이지 살인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변론케 했다. 미주전역에서 한인들은 이 재판이 곧 우리나라의 독립과 우리민족의 자유를 건 재판으로 생각하여 앞 다투어 의연금을 보내왔다.
미주 본토는 물론 하와이, 국내와 멕시코, 러시아, 중국, 일본 등지에서 모금에 참여한 동포들의 숫자는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총 8천568달러41센트(어떤 기록은 7390달러)가 모금되어 일체의 경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버클리에서 유학하는 중국학생대표가 의연금 10달러를 내어서 재미교포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때 두 의사 후원 관계자들은 이승만을 동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불러와 법정 통역을 부탁했다. 그러나 재판이 지연되자 이승만은 “논문을 써야 되니 시간관계로 더 있을 수 없다. 나는 예수교인인 만큼 살인재판의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며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여비와 1개월 체재비만 쓴 셈이어서. 한인들은 “그러려면 오지나 말지. 동포들이 애써 모은 비용만 쓰고 갔다”고 이승만을 비난했다. 그 후 이승만과 배재학당 동기였던 신흥우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올라와 통역을 맡았다. 전명운은 병원에서 퇴원 후 수감되어 미국 경찰 수사관에게 심문을 계속 받고 같은 해 7월 석방되었다.
장인환의 진술
장인환은 경찰서로 찾아온 크로니클 기자에게 의거 목적을 자필로 써주었다. 신문에는 서명까지 한 이 진술서가 사진과 함께 실리고, 그 요지는 번역 게재됐다. 그 내용은 참으로 애국충절에서 나온 것으로 한인들은 물론 많은 미국인들에게도 감명을 주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일찍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으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라를 돕기 위해 배우려고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 수백 수천 명이 일제의 손에 죽어가고 있는 때에 스티븐스는 한국 사람들이 일제의 침략을 환영한다고 하였다. 그가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말한 것처럼 거짓말로 대중을 속이고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하였다. 만일 그가 다시 살아서 한국에 돌아간다면 다시 그만한 한국인민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그를 저격하였다. 그럼으로써 나는 이미 죽임을 당한 동포의 영혼을 위로하고 또 장차 스티븐스에게 죽임을 당할 동포를 구하였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사람은 죽엄의 길을 알아야 한다. 내가 그를 죽이고 또 나도 죽으면 우리나라의 영광이며 우리나라 인민의 행복인 것이다.”
일본의 태도
일본은 스티븐스의 사망소식을 듣고 호외까지 발행했다.
“일본 황제는 스티븐스가 죽은 것을 슬퍼하고 친서를 발하여 조상하였으며 이등박문은 스티븐스의 부음을 듣고 보는 사람마다 향하여 애통한 정을 말하며 전체 일본인민도 크게 격앙하고 자리에 앓는다”는 내용이 실렸다. 한편 상항주재 일본 총영사 고이께는 사건발생 후 여론이 계속 일본의 한국 점령에 관심을 두고 한인사회에서는 항일운동이 점점 거세어지자 “스티븐스가 일본정치와 관계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며 그와는 사적관계로 스티븐스가 휴가를 이용해 미국을 방문한 도중에 만났던 것 뿐”이라고 발뺌을 했다.
고이께는 스티븐스가 한국정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었다고 일본정부와의 관계를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람을 죽였으니 사형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일본정부는 미국여론이 반일로 돌아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장인환, 전명운 두 사람을 기소하는 검사 측 통역관을 일본 총영사의 주선으로 도쿄에서 데려왔다. 일본 측은 일본이 한국의 진보 발전을 도운 것으로 보일만한 사례를 증명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기소검사에게 즉시 보냈다. 일본에 대한 한인들의 비난이 잘못됐다고 주장하기 위한 자료였다. 또한 고이께 일본 총영사는 검사를 도울 변호사로 사무엘 나이트를 5천 달러라는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면서 고용했다.
1908년 4월 4일 자 고이께는 자국의 외무대신에게 “변호사비가 하루 100달러이나 법정에 가면 1500달러를 추가로 주어야 하지만 기간이 너무 길지 않으면 5천 달러를 넘지 않게 하겠다”는 변호사의 말을 전문으로 보냈다.
사무엘 나이트는 “장인환의 행위는 우국충정에서 나온 거사가 아니라 한국 국민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적 범죄성향”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또 검사 측의 전문인 증인으로 선 정신과 의사 루스버그와 워스는 장인환의 정신 상태는 정상이라고 말해 변호인 측의 ‘애국적 충동에 의한 정신적 환상상태’ 주장에 맞섰다.
하와이 일본 영사관에서는 서기관을 별도 파견하여 재판 진행을 일일이 챙겼다. 또 재미한인단체의 동정을 살피면서 친일적인 한인 유력자를 매수하기도 했다. 스티븐스가 사망하자 일본정부는 치료비와 장의비 일체를 부담하고 유족에게 15만원을 주고 한국정부에게도 5만원이나 내게 하였다. 3월 28일 스티븐스의 누이와 그 남편이 장례식 참석 차 상항에 도착했다. 고이께는 3월 28일자로 페어몬트 호텔로 편지를 보내 사건이 났던 일요일 밤 스티븐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을 체포하지 않아 이런 슬픈 일이 생겼다며 안타까워했다. 5월 18일엔 일본 동경에서 추모진혼제까지 열렸다.
공판투쟁과 판결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의 공판은 3월 27일 경찰법원에서 시작됐으나 살인중죄인으로 곧 상급법원으로 옮겨져 미주 한인뿐만 아니라 국내외 한민족 전체의 관심사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법원 12호 법정에서 배심원 12인을 선정하고 재판장 캐롤 쿡이 심의 판결하는 장인환 전명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다. 사건이 연일 신문에 보도되는 가운데 한인들의 들끓는 애국심에 감동한 카크란 변호사는 무료 변론을 자처했고 장인환, 전명운 구출위원회는 자원했던 나단 카크란과 존 바렛, 로버트 패럴 3명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그들은 전명운과 장인환의 케이스를 분리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저격사건과 관련, 사전에 의견을 나누거나 공모를 한 증거가 없다고 변호했다. 재판에는 일제가 고용한 나이트 변호사가 샌프란시스코 부 검사 헨리를 도와 장인환을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일급 살인범’으로 기소하고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피고 측 변호사들은 “이 사건은 일반적인 살인사건이 아니고 애국심의 자연스런 발로였으며 그 애국심의 충동에 의한 일시적인 정신적 환상상태에서 저지른 일이므로 무죄”라고 변호했다.
전명운은 총상을 입었으나 치료경과가 좋았다. 4월 3일 열린 재판에서 검찰은 전명운이 장인환과 살인을 계획한 공범이라고 주장을 폈다. 그러나 변호인 측은 전명운과 장인환은 공모한 적이 없으며 전명운은 오히려 스티븐스에게 폭력을 당한 피해자라고 변호했다. 또한 전명운은 총을 발사한 증거가 없으며 스티븐스에게 육체적 손상도 입히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명운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카크란 변호사는 배심원에게 살해행위 당시 피고의 정치적 동기로 인한 정신이상을 주장하고 마땅히 법률상 제재를 면제받을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이병준과 장라득이 증언석에 나와 일제의 대한 침략상과 장인환의 열렬한 애국심을 웅변적으로 증언했다.
이병준은 “장인환은 본래 애국지사다. 저 야만의 일본인이 우리의 힘이 약한 때를 승시하여 정권을 빼앗고 충신열사를 학살하며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를 강간하는 사실이 신문에 그칠 날이 없음에 장씨는 이것을 분개하여 자기의 몸을 국가에 헌신하기로 임이 같이 맹세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당 간사인 장라득은 “장인환은 작년에 알라스카에 다녀온 후에 모아 두었든 신문을 보고 7월 정변(광무황제의 퇴위사건과 군대를 해산시킨 일)의 참혹한 사상을 생각하고 자연 상심하여 혹 잠도 아니 자고 밥도 아니 먹을 때가 있으며 매양 나라를 생각하고 통곡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의 증언에 12명 배심원 중 상당수가 감명을 받았다. 또 다른 여러 한인들도 증언대에서 장인환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다.
배렛 변호사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에 나라만 사랑한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잠시 내 나라를 해하는 도적을 만나 총을 들었다. 이는 나라 사랑하는 열광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알지 못하고 저지른 것이다. (중략) 나는 장인환이 무죄라고 믿는다”고 변론했다. 그의 변론에 배심원 중 2명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는 이어서 “오늘 이 재판은 큰 권세 있는 일본과 망명객 장인환이 서로 재판하는 일이다. ……사람이 남의 집에 들어가 집주인을 죽이고 재물을 겁탈하는 것이 진짜 죄다. 이런 죄야말로 1등 살인죄”라며 죄는 스티븐스에게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이트 검사가 피고 심문에서 “한국은 이미 망하게 됐고 일본이 도와서 한국국민을 잘 살게 할 터인데 무슨 불평인가”라고 묻자 장인환은 “일제를 찬양함은 이천만 동포를 독살하는 것이니 적을 죽이지 아니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가 멸망케 되므로 죽였다. 우리는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이며 나는 죽어서 자유로운 혼이 될지언정 살아서 노예는 될 수 없다”고 당당히 말했다.
패렐 변호사는 “피고는 일본제국이 한국을 침략한데 분개하여 자기가 희생할 각오를 한 것이다. 우리도 미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선조들을 생각해 보자”면서 “마침 내일 모레가 크리스마스이니 한국의 애국자 장인환을 구해 달라”고 배심원을 설득했다. 장인환은 당시 산호제 브라운 기숙학교 프란시스 부인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부인이 증인으로 나와 “장인환은 매우 정직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배우기에 열중하고 부지런한 청년이다. 그의 피부는 다르나 나는 그를 친자식처럼 생각한다. 이번 일은 순전한 애국심에서 일어난 것이다. 나는 지금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일랜드계로 무료 변호를 자청했던 카크란 변호사는 “역경 속에서 자주독립을 고수할 수 있는가”, “악인을 제외하는 것이 애국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가” 등의 장인환에게 유리한 질문으로 변론을 이끌어 나갔다. 이에 장인환은 “다른 사욕은 없다. 악의 논리를 장려하는 사람은 인간사회에 독이고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법정에 있던 한인들은 장인환의 떳떳한 모습과 증언에 자부심을 느끼고 다시 한 번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카크란 변호사는 마지막 변론에서 “고상한 인격자, 진실한 애국자, 참된 인간을 구원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여기 앉아 있는 수십 명의 사람은 다 한국 사람들이라 자기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포의 몸을 구원하려 한다.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일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장인환을 죽인다면 그의 원통한 피가 더 말할 수 없다. 또 하나 지금은 예수의 탄일이니 이러한 명일에 불쌍한 의사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배심원 여러분은 애국 의사 장인환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심원들은 쿡 재판장의 법률적 설명을 듣고 그날 밤 9시19분부터 11시15분까지 별실에서 장장 3시간 가까이 판정회의를 열었다. 12명의 배심원 중 일곱 명은 사형을 주장하고 다섯 명은 무죄를 주장하여 타협이 되지 않았다. 계획된 암살이라고 판단하는 사람과 이성적으로 판단할 여유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행동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 간의 의견 차이는 몇 차례의 투표로도 좁혀지지 않았다. 장시간 토론이 맴돌자 크리스마스 정신으로 배심원들 간에 타협하자는 안이 나왔다. 배심원들 자신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빨리 판결을 매듭짓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8차례의 비밀투표 끝에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Insane Delusion)’로 배심원의 일치를 보았다. 사형을 면했으므로, 장인환의 공판은 한인들이 원하는 대로 끝난 셈이었다. 이 사건의 발생은 매스컴을 통해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대내적으로는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결속력과 박차를 가져왔으며, 장인환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인들에게 승리를 의미했다.
재판은 1909년 1월 2일까지 장장 280일 동안 열렸다. 2급 살인죄는 사형은 면하고 최고 30년, 최하 10년의 징역형을 받게 되어있었다. 1909년 1월 9일 쿡 판사는 장인환에게 25년 금고형을 선고했다.
선고 후 장인환의 태도
판사의 판결에 대한 장인환은 “나는 내 나라에 의무를 다 한 것뿐이다. 나는 차라리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원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더 영광이다. 내 나라를 위해 죽는 것 그것이 내게는 영광이다.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최정익이 “25년 징역은 안 돼. 대법원에 상소해야 한다.”고 하자 장인환은 “우리 한인들의 재정이 약하고 지금까지 허비한 경비가 막대합니다. 하여튼 사형이 아니니 살아나갈 수 있지 않겠어요.”했다. 장인환은 공판정에 나와 있던 사람들에게 “25년은 긴 세월입니다. 내가 25년을 못 채우고 죽을는지 어떻게 압니까? 친구들, 부디 한 가지 기술을 배워서 조국에 돌아가 만인에게 평등한 자유의 새 민주대한을 건설하세요. 이것이 나의 최후 부탁입니다”라고 말했다.
장인환의 수감생활과 그 후
장인환은 죄수번호 23295호를 달고 1909년 1월10일부터 북가주 쌘퀸틴 감옥에서 외국인 정치범 대우로 복역했다. 신한민보 1월27일 기사엔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라야 (장인환을) 아무나 상면할 수 있다하며 샌퀸틴 감옥은 상항서 내왕차비가 50전”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감옥규칙을 잘 지키어 다른 죄수들의 모범이 되었다. 교도소 안에서 그가 한 일의 기록을 보면 1909년 1월 11일부터 10월 13일까지 카펫의 실 짜는 일을 하고 1909년 10월 13일부터 1912년 9월 19일까지는 세탁기술을 배웠다. 1912년 9월 19일부터 출감할 때까지 양복 다리는 일을 했다. 품행이 언제나 단정했으며 일요일에는 옥중교회에 다녔다. 한인사회에서는 세 차례의 석방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기각되다가, 1918년 강영소 국민회장과 황사선 목사 등이 출옥 후 생계 보장을 책임진다는 조건하에 감옥에 들어간 지 10년 만인 1919년 1월 10일 가석방됐다.
한인사회에서는 돌아온 애국지사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가석방 상황에서 장인환은 월마다 신상보고를 했는데 1924년 4월 10일에 이르러서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다. 그 뒤 그는 십 수 년 꿈에도 그리던 고향 평양으로 간다. 그러나 그토록 그리던 조국으로 가려던 그 앞에 장애가 생겼다. 그것은 당시 한국에 가려면 일본 영사관에서 일본인여권을 발급 받아야만 했다. 고민하던 장인환은 일본인 여권을 받아 23년 만에 조국으로 갔다. 고향친구들의 소개로 그때까지 총각이던 51세의 장인환은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인텔리여성 윤치복양(21세)을 만나 오기선 목사의 주례로 두 사람은 혼인하기에 이른다. 동아일보는 ‘노신랑소신부’라는 제목으로 그들의 결혼기사를 다뤘다. 평생 자신의 고향인 선천에서 고아원 경영이 소원이던 장인환은 출옥 후 ‘대동고아원 외국총무’라는 직함으로 미전역에 모금운동을 벌였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은 물론 하와이까지 두루 심방해 789명에게 모금해 평북 선천읍 천목동에 연와제 고아원을 짓고 그 주변에 만 이천 평에 달하는 토지도 매입했었다. 1927년 2월 27일 자 동아일보는 그가 도착하기 전 ‘재외동포의 동정과 내지 동포의 감사, 선천고아원 전도 양양’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장인환이 결혼까지 하고 선천 고아원을 경영하자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져 결국 그는 일 년도 못 돼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생계유지가 급급해 친구들의 도움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세탁소를 열었다.
최소한의 경제적인 여유가 되면 부인을 초청하려 했으나 이민법으로 길이 막혔고 돌아온 후 유일한 혈육 딸마저 죽었다는 소식에 상심했다. 사정을 모르는 부인이 “왜 나와서 살지 않느냐, 왜 빨리 데려가지 않느냐”고 재촉편지를 자주 보냈다고 한다.
<장인환과 관련한 문건>
▷ 1909. 7.28 신한민보: 조국의 쇄운을 분개하여 국가의 공적을 더하고 몸이 옥중에 있는 애국의사 장인환씨는 불철주야하고 영어와 영문을 전공하는데 일전에 그 친필로 쓴 영문편지가 어떤 곳에 왔으니 보는 자 그 학력의 신속함을 복지 않는 이 없었다더라.
▷ 1914. 1.29: 장인환 씨 편지-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내신 성탄예물과 새해문안카드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이 정성 되고 기쁜 뜻으로 여러분에게 회답하여 나를 이같이 사랑하시는 정을 표하고저 하옵나이다. 나는 우리 주 예수의 사랑하시는 안에서 육신과 영혼이 다 평안하고 즐거이 지나며 또한 하나님께 우리민족을 전진하게 하며 발달하게 하여 피차에 사랑하고 단합하야 장차 우리의 일어발인 나라의 자유를 회복하고 인민을 노예가운데서 구원하게 하기를 쉬이지 안코 기도하며 또한 태평복락을 누리게 되기를 기도하옵나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우리 주를 십자가에 고난 받게 하야 우리로 하야금 거록하게 하얏스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의지하야 서로 사랑할 것이라 사랑은 오래 참으며 사랑은 밋으며 사랑은 바라며 사랑은 낙심치 안코 영원히 힘쓰나니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노라. 또 다시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나의 사랑하는 마음과 기도하는 뜻으로 사방에 있는 여러 형제자매에게 문안하나이다.
건국기원 4247년 1월27일 칼리포니아 싼퀴인틴감옥 댱인환 샹
▷ 1918. 10.3 신한민보 : 철창 냉옥의 장의사는 백일 후에 출옥-장인환의사는 장년의 좋은 시대가 10년 철창에 거의 늙어 앞머리가 드문드문 빠지고 안색이 창백하여 당년의 영풍활기가 없는지라……더운피의 구각이 이제 얼마나 더 늙었는고?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
스티븐스 저격사건은 미주에서의 한국독립운동에 불길을 당기는 전환점이 되는 등 해외항일운동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이 사건은 안중근의 이등박문 저격사건과 이재명의 이완용 저격 의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러시아의 하얼빈 역에서 을사보호조약의 원흉 통감 이토를 3발의 총탄으로 제거하였다. 이등박문이 군대와 외교관에게 인사를 마치고 막 마치고 마차를 타려는 순간 양복에 캡을 눌러쓴 그는 이등박문에게 단총을 연발하였다.
흉부에 두발과 복부에 한발을 맞은 이등박문은 오전 10시에 69세로 절명하고 안중근 의사는 “이제야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았다.”고 하며 ‘코리아 만세’를 외쳤다. 안 의사는 이듬해 3월 25일에 옥중에서 그의 나이 32세에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샌프란시스코 국민총회는 안 의사의 변호 비를 위해 1910년 3월 7일과 4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1천 5백 달러를 해삼위(블라디보스톡)로 보냈다.
본명이 이수길인 이재명은 1888년 평양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1905년 미국에 이민 와서 노동에 종사했다.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회원이었던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준열사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일로 열린 1907년 7월 샌프란시스코 공동회의에 참석하였던 그는 19살의 나이로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것을 자원했다. 그의 목적은 매국노 숙청이었다.
그해 10월 귀국하였으나 매국자들을 만날 기회가 없어 2년의 세월을 보냈다. 이재명은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했다가 인력거를 타려던 총리대신 이완용을 공격했다. 학생복 차림의 이재명은 거침없이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칼로 이완용의 어깨와 배를 찔렸다. 인력거 차부가 달려들었으나 이재명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이완용 위에 올라타고 다시 단도로 거듭 찔렀다. 체포되면서 이재명은‘대한제국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이완용은 중상을 입고 죽지는 않았다. 일제는 미공개 재판을 열어 1910년 9월30일 의사 이재명을 사형에 처하였는데 그의 나이 2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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