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운 의사(1884-1947)
전명운은 188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성학원(경기고 전신)에서 수학하던 그는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다 일본 헌병에 쫓기어 1905년 결혼한 지 3일 만에 간도와 연해주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하와이 농장에서 일하다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철로 공사장과 알라스카 어장에서 노동자로 다녀왔다.
미주 독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 회원으로 청년회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3월 스티븐스가 미국에 도착한 후 기자회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통치를 잘된 일이며 일제의 통치만이 한국을 발전시킨다.”는 내용의 망언을 하자 몹시 분개했다.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회원들은 대표자를 선출하여 망언을 취소하려 하였으나 요구가 묵살되자 이 두 협회에서는 스티븐스 처단방법을 논의하게 되는데 전명운이 자원하게 된다.
1908년 3월 20일 오전 9시30분 경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페리 항에 도착하였다. 대기하고 있던 25세의 전명운은 스티븐스에게 권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불발되고 만다. 전명운은 스티븐스의 멱살을 잡고 총으로 그의 턱을 내려치며 육박전을 벌였다.
이때 장인환이 권총을 발사한다. 불행하게도 장인환이 쏜 세 발 중의 한발에 전명운은 어깨에 맞고 쓰러졌다. 경찰은 암살의 주 용의자로 장인환을, 공범 혐의로 전명운을 체포했다.
전명운은 ‘살인미수혐의’로 구속되었으나 1908년 6월 27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선고를 받고 97일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일본공사와 영사가 배후에서 그의 재수감을 노리는가 하면, 협박 등을 일삼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이름을 Mack Field라고 고치기도 한다. 전명운은 “진행 중인 장인환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타지로 떠났다가 돌아오라”는 장인환 변호사의 권유로 뉴욕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그 뒤 러시아의 연해주로 간 그는 그곳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항일운동과 연설을 하였다.
한편 밤에는 노어학교에 다니며 노어를 열심히 배우며 연해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동의회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는데 이때 안중근 의사와도 상면하였다. 1909년 5월에는 국민회의 이상설, 공립협회 대표 김성무와 함께 러시아를 순행하며 러시아에 16개소의 지방회를 조직하는데 힘을 썼다. 1915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스탁톤 등 농장지대에서 일을 하면서 ‘조국한국을 돕자’는 외침아래 의용군을 조직하여 활약하며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고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돕기도 하였다.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가 스티븐스를 죽여 일제의 기를 꺾자 국내 일본 미국 멕시코 상해 등지의 한인들이 희사한 의연금이 무려 8천568원41전이었다고 조선총독부경무국 조사에 나와 있다. 1917년 12월 27일 신한민보에는 “스탁톤에 거주하는 전명운 씨 부인은 나이 40에 처음으로 잉태한지 6개월에 신체가 강건치 못해 스탁톤 카운티병원에 입원하였다. 부인은 회복 후 차도가 있으나 세상구경을 못하고 불쌍히 생명을 잃어버린 어린 아해가 참으로 불상한 일이며 또한 병원비도 매일 적지 안타 하였더라”고 적혀있다. (당시 전명운은 스탁톤에 살았다.)
1920년께 주순기(또는 추순기)와 결혼을 하여 1929년 맏딸이 7살, 둘째 딸이 5살, 막내아들이 2살이 채 못 되어 부인은 일찍 타개하였다. 이때부터 전의사는 고생을 많이 하고 미주에 경제공항까지 겹쳐 자녀를 키울 수가 없게 되자 세 자녀를 프레즈노에 양부모가 길러주는 곳에 맡기고 1929년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였다.
후에 천주고아원에 있던 세 자녀 중 7살 난 막내아들이 수영장에 빠져 숨진 후 전 의사는 말이 줄었다고 한다. 1983년 초기인맥을 캐던 민병용 씨는 전명운의사의 맏딸 로즈메리이여사와 홀트양자회 남가주지부 책임자로 한국 어린이를 위해 사회사업을 한 적이 있는 마가렛표 여사를 만났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와 함께 거의 산적이 없어 두 딸은 스티븐스사건의 높은 뜻을 거의 알지 못한다고 했다. 전명운은 1947년 11월 19일 하오 7시 고혈압에 의한 혈관파열로 63세를 일기로 우울한 생을 마쳤다. L.A. 근교 위티어에 있는 천주교 장지에 Mack Field라는 이름으로 묻혀있었다. 한국정부가 본국으로 이장하려 하였으나 딸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다 1994년 4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량의사합전
‘량의사합전’은 1909년 한인공동회가 제작 간행한 장인환과 전명운의 전기이다. 필자는 헤이그에 특사로 갔던 이상설로 헤이그에 갔다가 미국으로 온 후 공립협회관에 머물며 이를 완성했다.
이 책은 의연금을 보내온 사람들에게 보내주었는데 모두 3000부를 찍어 미주 본토는 물론 하와이 1480부, 연해주 90부, 멕시코 70부 등 국내외에 배포해 두 의사의 생애와 의거 의의를 널리 알렸다.
듀람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2-1908)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였던 스티븐스는 1852년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하여 뉴욕 콜롬비아대학 법대 외교과를 졸업하였다. 잠시 국무성에 들어가서 일을 하다 주일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이 되어 동경에서 약 1년간 근무했다.
1년 뒤인 1883년 미국으로 돌아와 주미일본영사관의 서기관이 된 그는 일본에 심복이 되었다. 다음해 일본 외무성 고문으로 채용되자 본격적으로 한국에 대해 침략외교를 시작하였다. 갑신정변으로 체결하게 된 한성조약 때 일본 전권대사를 따라 내한하여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하여 일본에서 훈장까지 받은 사람으로, 포츠머드 러일 강화조약에는 ‘지도, 보호, 감리’라는 글을 넣으므로 한국을 지배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1904년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초빙되어 몸은 미국사람이나 일본의 복리를 위해 일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미조약 체결에 앞장서고 1907년 헤이그 밀사 후로는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정미조약 체결에 중요한 몫을 하였다. 그가 1908년 미국에 온 이유는 겉으로는 휴가라고 하였지만 미국 안에 일본 노동자 배척운동이 격화되고 국회에 그 법률안이 상정되어 있어 국회의원 및 유력자와 접촉하여 일본에 불리한 법안의 제출 및 통과를 방지시키려는 목적이었다. 1908년 3월23일 샌프란시스코 페리 항에서 장인환의사의 두발의 총에 맞아 1908년 3월25일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4월 18일 워싱턴에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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