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독립운동사 – 장인환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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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환 의사(1876-1930):
1876년 3월 10일 평북 선천에서 출생한 의사는 어머니는 6살에 아버지는 16살 때 일찍이 양친을 여의었다. 소학교를 마친 뒤 상점점원으로 일하다 1895년에는 평양에서 상점을 경영하였는데 실패하였다. 국세가 기우는 것을 개탄하고 국가중신들이 일제에 아부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는 것을 보고 미주에 유학하여 국치를 씻겠다고 1904년 2월 28세에 하와이 코알라농장으로 노동이민을 하였다. 1906년 7월 한인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8월과 9월에는 퍼시픽 철도공사에서 철로를 놓는 고된 중노동을 하다 작업 중 허리에 부상을 당해 치료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공립병원에 있었다. 농장에서 고용살이도 하이트 가에 있는 식당에서 식당일도 제이슨 가 하숙집에서도 일했다. 1907년 여름에는 알라스카 얼음판에서 연어 통조림 인부로 일하다가 9월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상항한인감리교회 창설멤버였던 그는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에 가입하여 맹렬히 활약했다. 1908년 3월 23일 그는 샌프란시스코 페리 항에서 일본 앞잡이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세 발의 총성으로 쏘아 죽이고 젊음을 옥중에서 바쳤다. 사건 후 일제 측과 검사 측은 장인환을 일급 살인범으로 몰아갔으나 변호인 측은 일반적인 살인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나온 애국심의 발로임을 강조했다. 1909년 1월까지 280일 동안 팽팽한 공판투쟁 끝에 장인환은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로 25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San Quentin 감옥에서(죄수번호 23295) 정치범으로 모범적인 수형 생활과 대한인국민회의 끈질긴 석방운동으로 10년 만인 1919년 1월 10일 가석방됐다.

출감 후 대동보국회가 한국에 세운 대동고아원 외지 총무를 맡았다.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있을 즈음, 이미 장인환은 김마리사와 고아원 일에 열심이었다. 그는 투옥되는 바람에 고아원 측에 100원을 보낸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데 대해 몹시 괴로워했다. 그 사실을 안 주위 사람들이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약속을 지켜주었다.

장인환의 수감생활과 그 후

장인환은 죄수번호 23295호를 달고 1909년 1월10일부터 북가주 쌘퀸틴 감옥에서 외국인 정치범 대우로 복역했다. 신한민보 1월27일 기사엔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라야 (장인환을) 아무나 상면할 수 있다하며 샌퀸틴 감옥은 상항서 내왕차비가 50전”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감옥규칙을 잘 지키어 다른 죄수들의 모범이 되었다. 교도소 안에서 그가 한 일의 기록을 보면 1909년 1월 11일부터 10월 13일까지 카펫의 실 짜는 일을 하고 1909년 10월 13일부터 1912년 9월 19일까지는 세탁기술을 배웠다. 1912년 9월 19일부터 출감할 때까지 양복 다리는 일을 했다. 품행이 언제나 단정했으며 일요일에는 옥중교회에 다녔다. 한인사회에서는 세 차례의 석방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기각되다가, 1918년 강영소 국민회장과 황사선 목사 등이 출옥 후 생계 보장을 책임진다는 조건하에 감옥에 들어간 지 10년 만인 1919년 1월 10일 가석방됐다.

한인사회에서는 돌아온 애국지사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가석방 상황에서 장인환은 월마다 신상보고를 했는데 1924년 4월 10일에 이르러서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다. 그 뒤 그는 십 수 년 꿈에도 그리던 고향 평양으로 간다. 그러나 그토록 그리던 조국으로 가려던 그 앞에 장애가 생겼다. 그것은 당시 한국에 가려면 일본 영사관에서 일본인여권을 발급 받아야만 했다. 고민하던 장인환은 일본인 여권을 받아 23년 만에 조국으로 갔다. 고향친구들의 소개로 그때까지 총각이던 51세의 장인환은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인텔리여성 윤치복양(21세)을 만나 오기선 목사의 주례로 두 사람은 혼인하기에 이른다. 동아일보는 ‘노신랑소신부’라는 제목으로 그들의 결혼기사를 다뤘다. 평생 자신의 고향인 선천에서 고아원 경영이 소원이던 장인환은 출옥 후 ‘대동고아원 외국총무’라는 직함으로 미전역에 모금운동을 벌였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은 물론 하와이까지 두루 심방해 789명에게 모금해 평북 선천읍 천목동에 연와제 고아원을 짓고 그 주변에 만 이천 평에 달하는 토지도 매입했었다. 1927년 2월 27일 자 동아일보는 그가 도착하기 전 ‘재외동포의 동정과 내지 동포의 감사, 선천고아원 전도 양양’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장인환이 결혼까지 하고 선천 고아원을 경영하자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져 결국 그는 일 년도 못 돼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생계유지가 급급해 친구들의 도움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세탁소를 열었다.

최소한의 경제적인 여유가 되면 부인을 초청하려 했으나 이민법으로 길이 막혔고 돌아온 후 유일한 혈육 딸마저 죽었다는 소식에 상심했다. 사정을 모르는 부인이 “왜 나와서 살지 않느냐, 왜 빨리 데려가지 않느냐”고 재촉편지를 자주 보냈다고 한다.

장인환의 사망

1924년 4월 10일에 자유의 몸이 되어 1927년 4월 20일 25년 만에 고향을 찾아 평양역에 도착하였다. 삼촌 장명진 댁에 머무르던 장의사를 조만식 등이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선천에서 고아원을 경영할 것을 말하였다. 그곳에서 결혼을 한 장인환은 일경의 감시로 조국에서 포부를 계속 펼 수 없어서 동년 10월 11일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1930년 5월 22일 장인환은 샌프란시스코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3층 병원 유리창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티븐슨에게 총을 겨누고, 의연한 자세로 십여 년 감옥생활을 한 그의 모습에 비해 그의 말로는 너무도 허무하고 비참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이미 쇠약해있었고 몸은 악명 높은 감옥에서 이미 망가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소변불통으로 입원했다지만 자살의 동기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밝힌 문헌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극심한 생활고로 인한 정신적 갈등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4세로 마감된 장인환 의사의 소식을 들은 한인사회는 비통하기 짝이 없었다. 뜻있는 한인들과 외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5월 26일 하오 2시30분 장인환 의사의 장례가 한인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시신은 샌프란시스코 인근 콜마 시의 사이프러스 공동묘지에 ‘대한의사 장인환공의 묘’라고 새긴 비석과 함께 안장됐다. 그 뒤 1975년 8월 3일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샌프란시스코 남쪽 Colma City에 위치한 사이프러스 묘지 모습.

한편 장인환과 전명운, 두 의사가 스티븐슨을 저격한 사건은 우연이었던 것처럼 문헌에 나타나고 있지만, 장인환은 귀국하였을 때 1927년 4월 2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리 약속하였다”(전명운과)고 말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장인환과 관련한 문건>

▷ 1909. 7.28 신한민보: 조국의 쇄운을 분개하여 국가의 공적을 더하고 몸이 옥중에 있는 애국의사 장인환씨는 불철주야하고 영어와 영문을 전공하는데 일전에 그 친필로 쓴 영문편지가 어떤 곳에 왔으니 보는 자 그 학력의 신속함을 복지 않는 이 없었다더라.

▷ 1914. 1.29: 장인환 씨 편지-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내신 성탄예물과 새해문안카드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이 정성 되고 기쁜 뜻으로 여러분에게 회답하여 나를 이같이 사랑하시는 정을 표하고저 하옵나이다. 나는 우리 주 예수의 사랑하시는 안에서 육신과 영혼이 다 평안하고 즐거이 지나며 또한 하나님께 우리민족을 전진하게 하며 발달하게 하여 피차에 사랑하고 단합하야 장차 우리의 일어발인 나라의 자유를 회복하고 인민을 노예가운데서 구원하게 하기를 쉬이지 안코 기도하며 또한 태평복락을 누리게 되기를 기도하옵나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우리 주를 십자가에 고난 받게 하야 우리로 하야금 거록하게 하얏스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의지하야 서로 사랑할 것이라 사랑은 오래 참으며 사랑은 밋으며 사랑은 바라며 사랑은 낙심치 안코 영원히 힘쓰나니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노라. 또 다시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나의 사랑하는 마음과 기도하는 뜻으로 사방에 있는 여러 형제자매에게 문안하나이다.

건국기원 4247년 1월27일 칼리포니아 싼퀴인틴감옥 댱인환 샹

▷ 1918. 10.3 신한민보 : 철창 냉옥의 장의사는 백일 후에 출옥-장인환의사는 장년의 좋은 시대가 10년 철창에 거의 늙어 앞머리가 드문드문 빠지고 안색이 창백하여 당년의 영풍활기가 없는지라……더운피의 구각이 이제 얼마나 더 늙었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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