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은 원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정설을 믿었다. 자신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특별하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이었다. 그래서 자신들 외에 피부 색깔이 다른 민족을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선민사상은 초기 한인들을 언어의 장애와 문화의 차이로 힘든 것뿐만 아니라 심한 인종차별로 이어져 고통을 겪게 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인종차별을 법으로 금하던 시기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아무리 부당해도 그것을 마땅히 항의할 만한 방법도 항의할 곳도 없었다. 지금처럼 ‘미국은 이민의 나라’라는 인식을 갖지도 못해, 조국을 떠나온 사람으로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비단 한인들 뿐 아니라 동양인 전체가 인종차별의 대상이 됐고 진주만 사건이 일어나자 일인과 구별되지 않는 한인은 오히려 불이익을 더 당했다.
백인들은 “동양 황인종은 불가사의하고 부도덕적이고 광신적”이라고 생각했고 소위 ‘황화’또는 ‘황색 위기설’까지 나와 동양인종에 대한 박대는 더욱 심해졌다. Yellow Peril이라고 하여 동양에서 온 칭기스칸이라는 한 사람이 세계를 무자비하게 정복하던 시대에 대한 공포가 남아있어 동양인을 무서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동양인에게 적대적이던 사람들은 동양인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낮은 임금으로 일은 더해주니 결국은 백인들의 일을 다 뺏어 갈 것으로 생각했다.
1911년부터 1916년까지는 동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행 중에 호텔에도 들어 갈 수가 없었고 배가 고파도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도 없었으며 머리가 길어도 이발소에서 이발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한 모욕 속에서도 초기 이민은 언젠가는 조국이 해방되면 돌아가리라는 희망으로 모든 것을 견디고 참았다. 지식인들로 정치적 망명을 한 사람들은 더욱 심한 모욕감을 느꼈고 인종차별을 더욱 힘들게 견뎠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은 접시를 닦거나 남의 집을 청소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60년대 민권조례가 미국의회에서 통과되기까지 미국 식당에는 “우리는 손님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라는 글귀가 걸려있었다. 이것은 동양인과 흑인에게는 음식을 팔 수 없다는 뜻과 같은 내용이었다.
이민 1세들은 언어부터 부자유스럽고, 또한 조국을 떠날 때 이미 비장한 각오를 하여 차라리 차별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난 2세들은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따돌림과 놀림의 대상이 되면 더욱 힘들어했다. 놀려대는 아이들과 싸우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부모에게 원망을 했다.
2세들 중에는 한국이 미개한 나라이고 자신들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생각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에서 일하고 온 선교사들이 선교보고 및 모금활동을 하면서, 한국은 선교의 필요성이 절실한 미개한 나라라고 알렸던 데도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동양인 배척
◈ 1906. 10.11: 샌프란시스코 학군에서는 미국에서 난 일본인과 한국인은 백인이 다니는 학교에 다닐 수 없고 10월 15일 이후에는 클레이가 이남에 있는 중국인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라고 하였다. 당시 일인은 11만 명, 중국인은 4만 5천명, 한인은 천 명 정도였다.
◈ 1908. 2.17: 캘리포니아 의원 헤이쓰시가 황인종 배척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하원에 4개 조항으로 제출했다. 그 내용은 “청국인 거절하는 법률을 일본인 조선인 인도인 등에게도 시행한다. 교사, 상민, 학생, 유람객이 아닌 자는 법률 시행 일 년 내로 지방 관리에게 거주 증서를 맡고 조사를 받는다. 본 규례를 시행한 지 일 년이 지난 뒤에 발부한 증서를 서실 혹 파손한 확거가 있기 전에는 다시 주지 않는다. 교사 상민 학생 유람객의 입국은 가능하나 노동에 종사하여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규례를 범하는 자는 본국으로 송환한다. 학생은 종교, 과학, 공학, 문학기술에 관한 고등교육에 한한다” 등이었다.
◈ 1908: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에서 일본인이 세탁을 못하게 하는 모임을 조성하였고 음식을 만드는 쿡과 웨이터도 노조를 만들어 일본인을 배척하였다.
◈ 1909. 2. 28: 상항 각국인 빨래집들은 연합하여 일인의 세탁업을 배척하는데 통문을 돌렸다. “일인은 세탁물을 저의 자는 집에 두는 고로 악한 병이 전염하기 쉬우니 빨래를 일인에게 주지 마라.”
◈ 1913. 5.: 캘리포니아 주에서 The Alien land Act’(Webb-Heney Land Law)가 통과됐다. 동양인은 시민권을 받을 수 없고 땅이나 가옥, 건물을 살 수 없다는 내용이다.
◈ 1916. 4. 27: ‘노동당의 동양인 배척’
“본 항 노동당은 동양 사람이 이익을 침탈함이 날로 심하다 하여 4월 23일 각 노동당에 통문을 돌려 동양 사람을 고용하는 자본가와 동양 사람으로 더불어 물화를 교통하는 상점을 조사하여 노동당본부에 보고한 후에 다시 사람을 보내 어 자본가에게는 동양인 노동자를 내어 보내라 하였고 상점에는 동양인으로 더불어 물화를 교통치 말라 하였다더라.”
◈ 1916. 8. 3: 새크라멘토 물산진흥회와 잡화상점과 및 각 단체 대표자는 대회를 열고 연합하여 동양사람 각 소 상점에 물건을 팔지 말자고 결의하였다. 중일 양국 다수인이 상점을 개설하여 백인의 상무이권을 침탈함으로 새크라멘토 상인단체는 이를 제재하기로 진력 운동한다.
◈ 1917. 2. 5: 아시아의 미국입국 금지(필리핀과 일본 예외)-미국 이민의 영어시험 실시
◈ 1921: 국가별로 이민 수를 할당하는 이민법 제정-1910년 센서스에 나타난 해당국가 출신의 3%이하를 기준으로 함.
◈ 1924. 5.15: Oriental Exclusion Act 통과.
동양인 절대배척 법안이 국회에서 신 이민법 안을 통과되어 동양인의 입국을 절대 금지하니 일인의 소위 신사협정도 스스로 폐지되고 사진결혼도 저절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고등 학문을 위해 미국대학에 입학이 된 학생들은 예외로 입국할 수 있었다. 이 법으로 고국에 돌아가면 다시 올 수가 없으므로 가족을 만나러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였다.
◈ 1927. 7.1: 1920년 센서스를 기준. 미국 시민권을 신청할 수 없는 외국인은 미국이민을 허용하지 않기로 함-한국은 일본이 종속국으로 한국인에게도 이민자격이 부여되지 않았다.
◈ 1941. 1.17: 미국정부는 미주와 그 영토 안에 거주하는 일인의 소유재산을 봉쇄하였다.
◈ 1943: 중국인 배척법 철회.
◈ 1945: 전쟁 신부법(War Brides Act)이 제정되어 미군이 외국인 부인과 재결합 가능
◈ 1947: 아시아계 미국인 남자와 결혼한 아시아인 여성의 미국 이주 가능
◈ 1947. 7.22: 인종에 상관없이 미 시민권자의 배우자 입국허용
◈ 1952. 6.27: 맥카런-월터 법 통과. 모든 인종에게 미국시민이 될 수 있는 자격 부여.
인종차별 사례 증언
◈ 방사겸: 1916년 방사겸 부부는 타코마로 가는 길 센티넬라라는 곳에 정거장 옆에 3백 달러를 가지고 식당을 열었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편지에는 이곳에는 동양인은 받지 않으니 수일 내로 떠나라고 하였다. 시장을 찾아간 그는 사정을 얘기했더니 염려 말고 장사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그러나 가게주인도 협박편지를 받자 5년 계약을 했는데도 나가주길 바랐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다음날 사람 염통을 칼 2개로 찔러놓은 그림을 붉은 물감으로 그린 것이 날아왔다. 백인들은 밥값을 안내고 나가기 일쑤였고 어떤 사람은 방바닥에 물까지 끼얹고 갔다. 그러나 사업에 전 재산이 들어있으므로 이웃 장사꾼이 미워해도 그냥 견디자 해가 지나면서 수그러들어 2년 만에 5천 달러를 벌었다.
◈ 백 메리(백광선): 자신의 초기 이민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낸 자서전 ‘Quite Odyssey’에서 백 메리는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06년 12월3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부두에서 서성이고 있던 한 무리의 백인들이 우리의 가족을 보고 조롱을 하더니 내 얼굴에 침을 뱉고, 그 가운데 한사람이 어머니의 치마를 발길로 걷어차고는 소리를 질렀다. 외간 남자가 정숙한 부인의 치마를 걷어찬다는 것은 특히 한국부인에게는 실로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나는 왜 우리가 이런 곳에 와서 살아야 하냐고 울면서 따졌는데 아버지는 미국선교사들도 우리나라에 처음 왔을 때 돌을 던지고 ‘하얀 악마’라고 조롱하여 오늘 우리와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이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 백인들이 동양인에게 화가 나면 그냥 총을 쏘아도 어디 가서 말할 때도 없고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백인을 가까이 가서 볼 수도 없었다. ‘어디든지 ‘백인만을 위한 곳’이라는 큰 표시가 붙어있었고 극장에 가도 안내가 따라와서 구석진 자리에 따로 앉게 했다.
◈ 도라 김: 그녀의 가족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살았는데 그 이유는 중국 사람들만이 그들을 받아주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브로드웨이 길을 경계로 차이나타운이 끝이 나고 이태리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는 노스비치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경계선을 넘으면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는 이태리 아이들에게 맞았다.
◈ 장인환: 샌프란시스코에서 세탁소를 하던 장인환의 가게에 아이들이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깼다. “칭칭 차이나 맨 고 홈”이라고 놀려대어 다림질하던 장씨가 밖으로 뛰어나가 경관에게 호소를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 안영호: 중가주 농장에서 일하던 안창호의 사촌동생 안영호가 어느 날 식당에 백인 노동자와 함께 들어갔다. 식당의 웨이터가 백인에게만 식사주문을 받고 안영호에게는 거절하면서 “너는 왜 요코하마로 돌아가지 않는가”하고 조롱했다. 이에 안영호는 “내 돈도 미국 화폐이다. 이 돈이면 어디서나 물건을 살 수 있는데 너희들은 미국 상점이 아닌가”했더니 네게 팔 음식은 없다고 교만하게 반발했다. 안영호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의자를 집어서 웨이터 쪽으로 던졌다. 웨이터는 피하고 식당의 유리가 깨지자 주인은 경찰에 신고했다.
사건진상을 묻는 경찰관에게 안영호는 “나는 한국인이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일본과 싸워온 지 수 십 년이 됐다. 우리는 미국과 함께 일본과 싸운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내게 커피 한잔 안 팔고 내게 모욕되는 이야기를 하니 내가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당신 같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라고 했다. 경찰관은 “나도 네 경우에는 그렇게 했음직하다”라고 안영호를 두둔했다.
*극장을 가면 동양인 구간을 따로 해놓고 그곳에 앉게 했다.
◈ 쏘니아 선우: 초기 이민을 인터뷰하여 미주 이민역사에 중요한 기록을 남겨놓은 쏘니아 선우는 1937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졸업했으나 교원자격을 거부당했다. 아시아 계통 미국 시민에게는 교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1942년에는 그녀가 친구와 함께 요세미티 국립공원 근처에서 캠핑을 하고 있을 때 경관의 조사심문을 받았다. 미국 태생인 두 사람은 분개하면서 자기들의 시민권 권리를 주장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 주영한: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10년을 지내면서 한국정부에게 처음으로 7-8척의 선박을 사서 보냈던 그는 미국 감리교회에 참석하였을 때 옆에 앉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옮기라”하는 차별대우를 받았다. 백인들이 한인들을 수십 명 자기 차에 태워 윌슨 산에 올라가서 자신들만 내려오기도 하였다. 1920년대 털락(Turlock)에 있을 때는 “동양인은 들어올 수 없다”는 푯말을 쉽게 볼 수 있었다.
◈ 황사선: 1913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온 황사선목사는 우체국이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싶어도 직장을 잡을 수가 없었다. 30년이 지난 후 아들이 샌프란시스코 주립대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고 싶은데 학위가 있어도 동양 사람이라는 이유로 받아주질 않았다. 양복집에서 아버지를 돕다가 페인트칠을 하는 직장을 잡았다. 동양인에게는 집 청소 일이나 노동하는 일만 하게 하였다.
◈ 최정익: 공립신보 주필 최정익의 둘째가 샌프란시스코 에머슨 소학교에 다녔는데 1909년 1월 중순 교장이 편지를 보냈다. 학교법률 관계로 그 학교에서는 아이를 가르칠 수 없으니 동양인학교로 전학하라는 소개서였다. 이에 최정익이 샌프란시스코시 학무국장을 찾아가 문의한즉 학무국장이 학교장에게 전화로 설명하고 편지를 보내어 최양을 전과같이 통학하게 하고 또 동양인 학교는 다만 중국인의 아동만 위하여 설립한 것이니 한국 아동들은 어디서든지 차별하지 말라고 하였다.
◈ Easurk. Emsen Charr: (1932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칼)
1905년에 미국에 온 Mr Charr는 1918년부터 1923년까지 제 1차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참전하였다. Park College를 졸업했으며 1926년에 유학생으로 미국에 온 부인 Evelyn Charr와 샌프란시스코 1032 Jakson St에 살고 있다. 시카고에서 첫 아이를 낳고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학교에 다니던 중 둘째 애를 낳게 되어 두 아이를 키우느라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민국에서는 유학생만이 체류가 가능한 동양인 배척법안에 따라 부인에게 추방명령을 내렸다. 28개월 된 딸과 9주된 아들을 두고 가야 할 형편이 되었었다.
*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황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호텔로비에 한국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보았다. 그에게는 미국에서 첫 번째 보는 예배로 흥분과 감사 속에 폐회찬송을 부를 때 주먹 만한 돌이 날아 들어왔다. 호텔 앞 창문을 깨고 들어와 예배를 인도하던 방장로와 그가 거의 맞을 뻔하였다.
◈ 장리욱: 식당에서 동양인에게 점심을 팔지 않는 이유를 동양인에게 팔면 백인이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 조성학: “상항감리교회 교인 조성학이 쏘솔리토지방 공립학교에서 수학하다가 그때 배일운동이 심하여 황인종이라 하여 퇴학을 당하자 조씨가 일하고 있는 집주인이 상항에서 행세하는 법률사라 학교의 불공평을 분히 여겨 그 지방재판소에 수삼 차 재판을 정하였으나 일이 여의치 않자 조 씨가 학업에 성공할 것을 알아 슈터 씨가 집에서 중학교과정을 예비하게 하였다. 낮에는 부인이 역사와 문법과 전문등학을 가르치고 외에 성경공부도 시키며 밤에는 그 남편이 지리학과 대수학과기하학을 교수하며 그 외에 정치상호 요긴한 것과 애국지사의 행적을 많이 가르쳐 금년초기에는 중학교나 대학교 예비과에 들어가게 될듯하다.” (대도 1909년 3월 23일 제4호)
◈ 안창호: 1921년 9월 14일 미국입국 비자를 신청하였으나 거부당했다. 결국 그는 중국 국적을 취하여 1924년 12월 16일 중국여권을 가지고 미국입국 비자를 받고 미국에 돌아왔다.
◈ 강영승: 1905년 하와이로 이민 온 강영승은 1912년 본토로 와서 명문 시카고대학 법대에서 법학사학위를 받았으나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다시 과수원에서 일을 하였다.
◈ 서학빈: 입국거절-미주에 체류하던 서학빈이 본국에 가서 결혼하고 부인과 동반하여 1924년 7월 5일 씨애틀에 도착하였는데 신 이민법에(1924년 7월 1일부터 실시) 의하여 부인의 입국을 거절하였다. 각 방면으로 주선하여 11월 8일에 임시 상륙하였다가 마침내 환국 하였다.(공립신보)
◈ 한시대: 딜라노에 살았던 그는 한인 중에 제일 부자였다고 말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가 차를 사게 되자 그것을 시기한 백인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 염만석: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백인과 동양인들의 경계선 길인 부시St.을 걸어가다가 백인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백인들이 그를 일본사람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인들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인들이 모두 격리된 것을 모르고 한 일이라 다음에는 “나는 한국인입니다”라고 쓴 배지를 달고 다녔다.
남가주 Upland에서 일어난 인종 차별
‘Steward Incident’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미세스 메리 스튜어드가 소유한 엎랜드의 오렌지 농장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오렌지 따는 일군으로 한인들을 고용했는데 한인들은 그 농장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백인들이 한인캠프에 돌을 던지며 당장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고 위협했다. 캠프 안에 겁을 먹은 한인들은 죽을까봐 어쩔 줄 모르고 공포에 질려 떨고만 있었다.
이런 위기에 미세스 스튜어드는 경찰에 연락하여 한인들이 자신을 위해 총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한인들에게 누구든지 캠프에 쳐들어오는 자가 있으면 총을 쏴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신문사에 연락해 이 사건을 기사화하며 널리 알렸다. 백인일군들은 그녀에게 모든 한인들을 당장 해고하라는 협박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거절하며 “소수의 한인이 이 거대한 나라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일할 권리가 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들로 온당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로 너희들의 이 사람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라고 했다. 그녀의 강한 저항으로 캠프에는 더 이상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고, 그 후 정의감 있던 미세스 스튜어드는 이웃 농장주에게 한인들을 소개해 학생을 포함한 많은 한인들이 남가주에서 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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