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웠던 초기 이민들은 모이기를 좋아했다. 하와이 이민은 농장단위로 ‘동회’를 만들고 회장인 ‘동장’을 두었다. 동장은 한인들의 대변자도 되면서 한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이를 해결하며 규율을 어기는 사람을 처벌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는 공동적인 대의명분을 가졌다기보다는 농장 일을 원할 하게 하고 억울한 피해를 줄이려는 일종의 직장 조직이었다.
이에 비해 1903년 8월 7일 생긴 ‘신민회’는 애국과 항일이 목적인 미주지역 한인들 최초의 단체였다.
하와이 초기 이민들은 농장주 측의 부당한 대우에 대항하다 오히려 옥고를 치르게 되는 일이 생기자, 나라의 힘이 없어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느낀 한인들은 영사파견을 본국에 요청했다. 파견만 해주면 경비는 대겠다고 까지 했으나 끝내 좌절되자 스스로로라도 단체를 운영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이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은 친목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한 군소 단체가 1906년과 1907년 사이 28개나 생겨났다.
한인단체는 항일정신의 성격은 같았으나 제각각이었다.
1903년 샌프란시스코의 ‘친목회’로 시작된 미주본토의 한인 단체는 1907년까지 20여 개에 달했다. 1907년 7월 16일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이준 열사가 자결하자 한인사회에 팽배한 애국 항일 정신은 일반단체까지도 독립운동을 주목적으로 만들었다. 1908년 장인환의사의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발단이 되어 1909년 하와이와 미주 지역단체가 ‘국민회’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통합됐다. 1910년에는 ‘대동보국회’도 ‘국민회’에 참가함으로, 마침내 미주지역의 범한인 단체인 ‘대한인국민회’가 탄생하게 된다. ‘대한인국민회’는 명실공이 재미 한인의 이권보장과 조국광복운동의 중추기관이 됐다.
한인단체가 일찍 이루어진 배경
첫째, 초기 이민들은 전통의 한복을 벗고 항해 중에 지급된 양복을 입고, 남녀칠세부동석 사상을 깨는 등 진통을 겪으며 유교적 보수성에서 벗어났다. 도미한 지식인들은 지도자가 되고 그들의 지도를 받은 교민들은 쉽게 한인단체를 결성했다.
둘째, 경제력 성장이 힘이 됐다. 당시 지급 받은 노임이 시간당 69전이라고 했으나 당시 환율은 2:1로 한화로 따지자면 1원 40전에 해당됐다. 이 금액은 한국의 실정에 비할 때 7배정도 높은 노임으로 비교적 큰 수입이었다. 노동자 중에는 5-6개월 일하고 미화 50-60달러를 모았다는 보고도 있다. 경제적 안정 심리는, 대의명분과 친선목적을 가진 단체결성에 관심을 갖게 했다.
셋째, 미국정부가 한인들의 조국독립을 위한 정치 외교적 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해 주었다. 이민과 동시에 시작된 단체의 주목적은 동포의 안녕과 조국 광복에 있었다. 단체의 분열상도 있었지만 수시로 일어나는 항일 사건으로 인해 동포들은 조국 독립을 염원하는 열정으로 단체들 간의 연합과 통일을 일궈냈다.
상항친목회
1903년 9월23일 도산 안창호의 지도로 박선겸, 이대위, 김성무, 박영순, 장경, 김찬일, 김병모, 김동삼, 홍경술, 박승지 등이 발기인이 되어 샌프란시스코에 처음으로 조직된 단체다. 워싱턴가 중국인 소유 건물 지하실에 회관을 정했다. 초대회장은 안창호가 맡았다. 그 때 샌프란시스코 동포 수는 25명 정도로 인삼상인 아니면 유학생들로 생활이 곤궁했다.
친목회는 외롭고 가난한 이들이 서로 의지하고 생활의 안정을 얻는데 도움을 주려는 의도였다. 당시 인삼상인들은 행상구역 때문에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시비가 자주 일어났다. 이에 친목회에서는 반목을 없애기 위해 인삼의 협정가격을 정하고 판매구역도 한 달에 한번 씩 바꾸도록 하였다. 한인 노동자의 노동주선도 맡아서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일등, 한인 생활 향상과 친목을 도모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1904년 이후 하와이에서 동포들이 이주해 와서 회원이 49명이 되던 때, 조직과 규모를 확대개편하고 항일운동을 주목적으로 하는‘공립협회’로 발전했다.
공립협회
도산 안창호는 로스앤젤레스 부근 리버사이드에서 이강, 임준기와 함께 미국인 집주인에게 천 500달러를 빌려 한인 노동자 독립캠프를 설치했다. 전화도 2대 놓았다. 18명의 한인들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해 1개월 만에 빚을 갚은 이들은 1905년 4월 5일 최초의 정치 운동기관인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한인노동자들이 35명으로 증가해 낮에는 열심히 오렌지 따는 일을 했다. 밤에는 미국인 목사를 초청해 야학을 열고 성경과 영어를 학습하도록 주선했다. 리버사이드의 공립협회 사업이 성공하자, 회원들은 도산에게 활동자금을 공급할 테니 도산은 노동을 그치고 더 큰 사업과 나라 일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도산은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공립협회회장을 맡아 2년도 안 돼 600여 명이 모이는 큰 단체로발전시켰다.
공립의 뜻은 “단결하여 선다.”라는 뜻이다. 밖으로 세계만국과 공립하여 동족 간에 상부상조하고 애국과 항일 운동이 목표였다. 입법과 행정의 견제체제를 택하여 회를 민주주의 제도 하에 두고, 민족주의 이념으로 해외한인을 단합하고 이권보장 및 배일운동을 주도하여 국내외의 전폭적인 지지와 기대를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퍼시픽가 938호 3층 건물을 사서 1905년 11월 14일부터는 회관까지 갖춘 민족운동 단체가 됐다. 그해 11월 20일부터는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공립협회의 조직과 의미가 공립신보에 발표됐다. “공립협회의 제도가 완연한 헌법을 모방하였으니 대의원회는 즉 입법부가 되고 총회는 즉 행정부가 되었도다.(중략) 각 회의 행정 하는 임원의 과실이 있거든 입법하는 대의원이 마땅히 탄핵할 것이오, 대의원이 실책이 있거든 일반회원이 논박하여 피차에 서로 경계하며 서로 보호하여 원대한 목적을 기달 할 지어다.”
사업이 발전하자 로스앤젤레스, 레드랜드, 리버사이드, 오클랜드, 보이드, 락스프링스 등 6개 처에 지방회를 설립하였다. 1907년 6월 총회 발표를 보면 샌프란시스코에 291명, 로스앤젤레스에 127명, 레드랜드에 52명, 리버사이드에 150명, 락스프링스(와이오밍)에 34명 등 총 6개 도시에 654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했다.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 대 지진으로 회관이 소실되자 오클랜드 10가 416호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1년을 보냈다.
1907년 공립협회회원 김성무, 임치성, 이교담 등이 국내 지원 사업으로 천 300만원에 달하는 의연금 모집을 위안 ‘국채보상의원발기서’를 발표했다. 본국의 ‘제국신문’과 ‘황성신문’이 재정부족으로 폐간될 위기에 처하자 역시 의연금을 모아 보냈다. 1907년 5월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공립협회 총회 사무실 겸 지방회 사무소, 공립신보사를 샌프란시스코 1944 Buchanan St.에 임시로 얻어 사용했다. 그해 8월 392 오스틴 가에 집을 얻어 이전했다.
1907년 10월 9일 새크라멘토지방회가 회장 김경함, 부회장 신순만 등의 임원진으로 조직되어 새크라멘토 618 L St.에 사무실을 두었다. 1907년 10월 11일 공립신보에는 “새크라멘토지방에 거류하는 본회 회원들이 그곳에 경찰소를 정하고 이 달 5일에 공립회관을 세웠는데 삼층 벽돌집이라 집도 매우 좋거니와 자리도 우리 동포에게 편리케 놓였으며 또 그곳에 지방회를 실시하고자하여 총회에 청원하였다하니 그곳에 유하는 여러 회원의 열심히 대단한 것을 칭송할만하더라”라고 보도됐다. 10월 19일 건관예식을 거행하였는데 총회에서는 국기와 회기를 보내고 상항지방회에서는 비단 족자에 경영하는 글을 써 보냈다.
1907년 솔트레익 시티, 1908년에는 핸포드에 지방회가 조직됐다. 1908년 1월에는 시베리아 한인거주 지방에 김성무와 이강을 보내 수청과 치타지방에 원동지회를 설립하고 블라디보스톡 만주지방에 만주지회를 설립했다. 1908년 6월에는 새크라멘토가의 집으로 옮겼다가 8월 페리가에 집을 사서 회관을 완성했다.
1908년 11월에는 러시아 연해주 해삼위까지 지회를 확장했다. 1909년 1월에는 9개 지회에 회원이 8백여 명이었다. 1909년 미주 한인단체가 통합될 때 국민회로 합병되었다. 총 회장은 1차 안창호, 2차 송석준, 3차 정재관이 맡았다. 한편 1907년 8월9일자 신한민보에는 일부 공립협회 지원금 제공자 명단 및 금액이 실렸다.
임태호(30원), 이재수(25), 서상경(21), 최주희, 홍재성, 김종림, 박성삼(각 10원) 및 외 13명.
대동교육회
‘공립협회’도 발전과정에서 내부의 알력이 생긴다. ‘친목회’의 발기인이었던 장경이 도산과 뜻을 달리하여 1905년 12월 9일 캘리포니아 패사디나에서 ‘대동교육회’를 조직했다. 장경, 김미리사, 김우제 등을 발기인으로 회장은 김우제, 총무는 장경이 맡았다.
교육회의 주목적은 교육진흥이었다. 애국과 상부상조의 목적은 같았으나 만민평등과 민주정체 등 광범위한 명분을 포함하는 ‘공립협회’와는 사뭇 달랐다. 1907년 3월 2일 ‘대동교육회’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대동보국회’로 확대 개조됐다. 이미 회원은 5백여 명에 달하고 회비도 수천 원이 모금될 정도로 그 세가 확대됐다.
대동보국회
1907년 3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대동보국회는 안으로 모든 국민이 대동단결하여 조국의 군국을 보존함을 목적으로 2대 주의와 3대 총령을 제창했다. 2대 주의는 “천하에 공론을 환기하여 동양의 평화를 보유케 함이요, 안으로는 동포의 중심을 결합하여 한국의 안녕을 보전하려는 것”이었다. 3대 강령은, 인민의 교육확장과 실업을 일으키는 일과 자치건설이었다.
발기회원은 장경, 김우제, 이병호, 유홍조, 김마리사, 윤응호, 문양목, 최윤백, 장인환, 변창수, 김춘화, 김홍균, 송사원, 양주은, 백일규, 이면식, 방사겸, 조성학, 이학연, 박도선, 서택원, 박창운, 김필권, 이성칠, 김찬일이었다. 총무는 장경, 총회장은 이병호, 백일규, 문양목 등이 역임했다. 중앙회외 지방회를 두고 초대 중앙회장에 이병호, 총무에 장경이 선임됐다.
대동보국회는 스탁톤, 프레즈노, 칼린, 덴버, 쏠트레익시티 등 5개 도시에 지방회를 설립하고 중국 상해에까지 대표를 파견했다. 지회 설치에 이어 한자월보 ‘대동신문’을 간행했다.
그러나 1907년 9월 24일 중앙총무 장경이 원동지회설립을 위해 중국 상해로 떠나자 발전을 보지 못했다.
1907년 10월 3일부터 샌프란시스코 웹스터가에 대동교육회 중앙 총 회관을 설치하고 강경한 항일논조를 펴는 ‘대동공보’를 기관지로 발행했다. “의혈을 흘리지 않으면 독립할 수 없다”는 보국회의 이념과 투쟁방법은 급진적인 재미동포들의 지지를 받았다. 대동보국회 회원이던 장인환이 1908년 3월 스티븐스를 사살하자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7년 이후 여러 항일 단체와 일반 단체들까지도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답글 남기기